작년 전문펀드 36개 150억 달러 운용
선진국 공무원·대학연금 큰손들 "이자 주는 금덩어리" 새투자처로
미국·캐나다·호주 곡창지대서… 브라질·우크라·아프리카로 보폭 넓혀
아시아·아프리카 중심 세계인구 증가, 금세기말까지 끝없는 식량증산 필요
안정성·수익률·성과 보장 토대 마련
캐나다, 농지매매 규제 나서
“대대로 내려온 농지가 외지인들에게 넘어가고 있다.” “높은 소작료 때문에 살기 힘들다.”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얘기일까. 토지 정의가 무너진 봉건시대 혹은 외세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농민들의 한숨 소리로 들린다. 아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그 이웃 캐나다 곡창지대에서 최근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정부는 올 5월 이 지역 농지를 캐나다 연금펀드 혹은 다른 기관 투자자들에게 넘기는 걸 사실상 금지하는 응급 대책을 내놓았다. 서스캐처원 주정부의 라일 스튜어트 농업부장관은 “투기세력 개입으로 농지가격이 급등락해 농민들의 피해가 우려된다”며 “농지 소유에 관한 규정을 재검토할 시간이 필요한 만큼 검토 기간 중에 연금 혹은 그 곳의 위탁을 받은 운용사가 농지를 구매하는 것을 불허한다”고 밝혔다.
캐나다 지방정부 중에서도 서스캐처원 주는 농지 소유에 관해 엄격한 규정을 지키고 있었다. 캐나다 국민 혹은 100% 캐나다 기업인 경우에만 지역 농지의 매매를 허용했다. 그런데도 2002년 이후 대리인을 내세운 외지인과 연금 펀드의 농지 매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10년전 210㎢였던 외지인 소유 면적이 최근에는 3,387㎢로 늘었다.
미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캐나다처럼 농지소유를 직접 규제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난해 6월 현재 미국 농지 가운데 외국인 혹은 외국 법인의 명의로 등기된 농지는 10만4,000㎢로 남한 면적과 비슷하다. 미국 농지를 사들인 자본의 대다수는 영국 혹은 캐나다의 연금 펀드이지만, 미국 일부에서는 이를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여기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
농지를 빨아들이는 연금 펀드
미국, 캐나다 곡창지대 농지의 소유권 급변동 현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안정적 수익률을 추구하는 주요 선진국의 공무원ㆍ대학연금 등 ‘큰 손’ 투자자들이 농지를 새로운 투자처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증시에 상장된 기업 주식을 사고 팔던 투자자들이 농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선진국 농지의 90% 가량은 아직 농민 소유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본시장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금 펀드가 관리하는 농지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발 빠른 일부 연금 펀드에게 농지는 오래 전부터 주요한 투자대상이다. 카타르 국부펀드 산하 하사드(Hassad) 푸드는 2009년부터 호주 50곳의 농지를 매입,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사모펀드 테라핀팔리사즈는 낙농 기업을 사들이고 포도원 및 토마토 경작지를 매입한 후 모두 아몬드 경작지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챙기기도 했다.
지난해 연말 현재 국제금융시장에서 농업과 농지에 특화된 전문 투자 펀드는 36개, 총 운용자산은 150억달러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호주와 브라질에 이미 50억달러를 투자한 미국 교직원연금기금(TIAA-CREF)과 캐나다ㆍ영국의 웰컴트러스트 등 장기적 관점에서 기금을 운용하는 펀드들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투자 대상 농지는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이지만 최근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높은 수익률을 얻기 위해 브라질과 우크라이나, 아프리카 잠비아 등의 농지에도 투자를 시작했다.
장기투자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농지
장기투자를 중시하는 연금 펀드가 최근 농지 투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뭘까. 장기 투자에서 중시되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즉 장기간 높은 수익률과 안정성이 그 동안의 투자 성과에서 입증됐고, 국제곡물 가격 하락으로 지난해부터 농지가격이 일시적으로 약세로 돌아서 저가 매수 기회까지 발생한 상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농지 투자는 최근 20년간 그 어떤 투자 대상도 제공하지 못한 높은 투자수익률을 안겨 줬다. 특히 미국 농지의 경우 평균 연간 수익률이 12%에 달했다. 같은 기간 미 증시의 S&P 500지수 상승률은 평균 10%에 미치지 못하고 금투자 수익률 역시 6% 내외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가 상승에 따른 자본이득에 더해 매년 농지임대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까지 감안하면, 농지는 ‘이자를 주는 금’인 셈이다.
농지투자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안정적 수익률을 제공할 것이 확실시된다. 아시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전세계 인구 증가가 계속되는 만큼 인류는 금세기 말까지 끝없이 식량 증산을 이뤄내야 한다. 일부에서는 향후 40년간 인류가 식량난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생산해야 할 곡물의 양이 지난 1만년을 합한 것보다 많아야 한다는 계산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인구 증가에도 불구, 주요 개발도상국가에서의 도시화 진행으로 경작 가능한 농지가 줄어들고 있는 만큼 농지는 매우 희소한 자원의 반열에 오를 게 틀림없다는 점이 연금 펀드들의 눈길을 끌어 모으고 있다.
농지는 가격 변동 추세가 경기 순환과 상대적으로 둔감하고, 주식과 채권 등 전통적인 투자 자산과의 상관관계가 낮은 것도 장점이다. 뉴욕 금융가의 부동산 투자 전문가 데이비드 로저스는 “금융위기 이후, 가격이 떨어진다고 해도 최소한 휴지 조각은 되지 않는 실물자산 투자의 중요성이 높아졌다”며 “특히 농지는 빌딩이나 교량 등 다른 부동산과 달리 쉽게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측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수익률과 안정성에서 매력 덩어리인 농지 가격이 최근 2년간 곡물가격 하락으로 하락세를 보인 것도 연금 펀드의 움직임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따르면 옥수수 가격 하락으로 아이오와주 일대 농지가격은 지난해 9% 가량 하락했다. 농지투자 자문회사인 ‘팜랜드 파트너스’를 이끄는 폴 피트맨 대표는 “농지 가격 안정세가 오히려 연금 펀드의 구매 기회를 확대시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농지가격 하락으로 평가 손실을 입었는데도, 기존 연금펀드는 오히려 농지 투자 규모를 늘릴 태세다. 투자 컨설팅 업체인 그리니치 어소시에이츠 조사에 따르면 최근 월스트리트의 상위 100대 펀드 임원들을 대상으로 유망 투자 대상을 조사한 결과, 농지가 올 하반기에 투자 규모를 늘릴 13개 유망 분야 가운데 에너지 섹터 다음으로 인기가 높았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미 50억달러를 농지에 투자한 TIAA-CREF는 이달 초 20억달러를 추가로 농지에 투자키로 결정했고, 전직 골드만삭스 출신 경영진이 독립해 결성한 사모펀드도 농지투자 목적으로 일반 투자자들로부터 1억7,300만달러를 조달하는데 성공했다.
농지투자의 빛과 그림자
연금 펀드가 농지를 사들이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를 둘러싼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해당 지역 농민들은 수익률에만 집착한 연금 펀드의 행동으로 농업 고유의 가치가 무시되고, 농촌 공동체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고 반발한다. 아이오와 지역의 소규모 농장주 레이 개이저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금 펀드가 옥수수와 콩 재배지를 매입한 뒤 해당 농지 관리를 지역 농민에 맡기지 않고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에게 임대를 줬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연금 펀드가 기업 방식의 영농을 선호하는 바람에 지역 사회의 청년들이 농촌에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나 타 지역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 농업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미국ㆍ캐나다ㆍ호주의 농촌 사회도 고령화 사회에 직면했기 때문에 연금 펀드의 농지매입이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다고 반박한다. 미국 일리노이대 브룩스 쉐릭 교수는 “미국 농부의 평균 연령이 58세에 도달했으며, 대부분 농가에서는 선대에 이어 농업에 종사할 후계자가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쉐릭 교수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캐나다와 호주 등도 마찬가지다.
인구 고령화로 ‘가족농’ 형태의 영농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연금 펀드의 토지 매입은 농촌 고령층의 안전한 노후를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자본과 기계를 투입한 대규모 경작으로 농업 생산성도 유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