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라면 이골이 날 법도 하건만 이준익 감독은 또다시 역사에 주목했다. 이 감독은 사극에 관한 변주가 능한 이다.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궁녀'(2007ㆍ기획)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평양성'(2011) 등 유독 옛 이야기에 현미경을 들이댄 관찰자다.
16일 개봉한 '사도' 역시 사극의 단골 소재인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에 관한 이야기다. 이 감독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게 된 인과관계에 주목, 영조-사도세자-정조에 걸친 3대에 조명을 비췄다. 그간의 사극들이 사도세자를 당쟁과 권력의 희생양으로 그렸다면 이 감독은 철저히 가족사로 묶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끌어냈다.
이 감독은 "사골처럼 우린 사도세자의 이야기에 뻔하다는 뜻은 많은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과 글을 통해 다듬어졌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뻔한게 어디 있나. 뻔해질 정도로 기억되고 회자됐다면 이면에 비밀이 있지 않겠나. 사도만 그런가, 세상사가 다 뻔하지"라고 말했다.
영화 '사도'는 궁궐에서 미치광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사도세자의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냈다. 이 감독은 사도가 죽임을 당한데 당쟁, 권력의 암투, 왕위 계승의 갈등이 아니라 그 원인을 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따르면 남편 사도세자는 궁내에서 무려 100명을 죽인 살인마다. 그러나 이 감독은 대중의 생각처럼 과연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광기가 충만했는지 눈여겨봤다. 이 감독은 "사도세자가 미친 짓을 한 게 고작 2~3년에 불과하다. 28년의 생애 동안 3년여의 결과를 두고 미친놈이다 단정 짓는게 더 뻔하지 않나. 원인이 무엇이고, 누구 때문이었을까. 바로 아버지 영조였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사도'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면서 영조의 콤플렉스를 집중 분석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간의 사극들이 영조의 관점에서 사도세자를 대상화시켰다면, 사도는 영조를 대상화시켰다. 관객들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에게 슬픔의 공감대를 크게 느끼는 점도 이 때문이다. 이 감독은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콤플렉스로 인한 피해자다. 영조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을 엄격하게 지켜 왕위에 올랐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타인에게는 어떨까. 영조는 그 엄격함을 아들에게도 강요했다. 반면 그런 억압을 받고 자란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게 반대로 관대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영조와 어린 정조가 숙종왕릉을 방문한 일을 두고 사도세자가 활을 쏘며 "그렇게 공부가 좋으냐"고 아들에게 묻는다. 자신과 다른 아들인줄 알았지만 "저도 그런 제가 싫사옵니다"고 의외의 대답을 듣자 허공에 화살을 쏜다. '존재 자체가 역모'라는 아버지의 비난이 아들의 진심 어린 고백으로 소통이 되는 장면이다. 이 감독이 강조하는 고백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한다. 세월이 흘러 사도세자의 무덤 앞에서 장성한 정조가 "소자가 아버님을 죽였습니다"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혜경궁 홍씨의 허연 머리가 되어서야 "지아비 앞에 왔사옵니다"는 신이다. 이 감독은 "혜경궁 홍씨의 대사는 볼 때마다 울컥한다. 고백만이 화해다. 어르신들이 그 장면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사도'를 연출하며 이전 사극 영화들보다 3배 이상의 정보를 취합했다. 이 감독은 "함께 작업한 작가들에게 공을 돌렸다. 나보다 작가들이 탁월하다. 어마어마하게 책을 읽는다. 영화판에서 책을 안 읽기로 소문났다. 다만 들은 정보를 조합하는 능력이 장점이다. 수많은 자료를 취합한 작가들이 시나리오 초고를 쓰면 대사, 지문을 리딩하며 각색한다"고 말했다.
'사도'는 개봉 7일 만인 23일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집계). 흥행의 포인트 중 하나는 아귀가 딱 들어맞는 캐스팅이다. 천만배우 송강호와 유아인에 문근영 김해숙 전혜진 소지섭 등 쟁쟁한 배우들이 똘똘 뭉쳤다. 많은 배우들이 거쳐간 캐릭터를 맡기까지 선택은 감독이 아니라 배우의 몫이었다. 송강호-유아인-소지섭으로 이어지는 부자(父子) 삼대는 묘하게 어울린다. 이 감독은 "소지섭 캐스팅은 삼고초려였다. 그의 눈을 보며 의리와 애통이 분리된 상태의 연기를 짐작했다. 제발 해달라 통사정했다"고 웃음 지었다.
'사도'는 왕좌, 왕위, 보위라는 뜻의 'The Throne'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에 출품된다. 한국사를 배운 관객들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를 요리조리 굴려 감상하지만 해외 관객들은 선입견 없이 객관적으로 볼 것으로 예상해 작명했다. 이 감독은 "우리 역사도 영국, 프랑스 역사에 못지않게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사극을 찍는 이유다"고 힘줘 말했다.
이현아 기자 lalala@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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