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에 우리의 경제생태계는 교란되었다. 저성장이 양극화로 이어지고, 양극화는 성장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최근에는 성장판이 닫히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커지고 있다. 우리의 경제생태계는 좀체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화가 가져오는 침체와 양극화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우리 내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성장과 분배, 혹은 경제와 복지 간의 논쟁은 늘 뜨거운 화두이며 보수와 진보 진영 간에 팽팽한 논쟁을 벌이는 주제다. 복지는 가계의 근로유인을 해치고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 보수의 주장이다. 반대로 복지는 사회통합을 이루고 내수를 활성화시켜 성장을 뒷받침한다는 것이 진보의 주장이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복지로 돌아오고, 복지가 다시 경제를 뒷받침하는 경제-복지 양립 해법은 없을까. ‘라이스테라스’라고 일컬어지는 계단식 논의 영농법을 보면서 문득 깨닫는 바가 있다.
중국 윈난(雲南)성에 있는 라이스테라스는 1,300년 전 한이족이 이주하여 일구어낸 서울 면적 크기의 계단식 논이다. 해발 3,000m의 고산지대에 한이족의 땀과 고난으로 1,500계단의 논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계곡에서부터 해발 1,800m 사이에 테라스가 형성되어 있고, 테라스 위에는 울창한 너도밤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그 숲이 일년 내내 논에 물을 댄다. 땔감을 얻기 위해서는 숲을 파괴해야 했지만, 영농을 위해 숲을 보존해야 한다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였다. 숲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임을 간파한 것이다. 계곡에서 올라온 따뜻한 공기는 테라스에서 증발된 수분을 흡수하고 고지대의 찬 공기를 만나 구름과 비를 만들었다. 비는 숲을 가꾸었다.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숲을 파괴했다면 미래는 없었을 것이다. 어려움을 참아낸 인내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약속한 것이다.
라이스테라스가 유지되는 이면에는 물과 농지의 공정한 분배가 있다. 모자이크 조각 같은 논들에 물을 대려면 물꼬를 골고루 터줘야 한다. 그리고 가파란 계단식 논을 오르내리는 고된 노동을 분담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아랫 논과 윗 논을 골고루 경작하게 했다. 물과 농지를 분배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두고 농사일을 면제해주었다. 공정하고 명망 있는 사람에게 그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바로 공무원인 셈이다. 이렇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 불만과 불신이 없어지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하였으리라. 출발점에서 서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 공동체를 유지시켜 주는 바탕이 되었다.
테라스에는 새끼 잉어와 우렁이를 풀어 놓았다. 잉어는 해충을 잡아먹고, 우렁이는 토질을 비옥하게 한다. 가축의 배설물은 바로 자연비료가 되었다. 수확 때에 잉어와 우렁이는 좋은 단백질원이 되었다. 오염원까지도 생태계의 일부로 녹여내고 순환시켜내었다. 농지 관리가 잘 되어야 잉어와 우렁이가 잘 번식할 것이고, 잉어와 우렁이의 번식이 건강한 벼를 만들어낸다. 바로‘창조경제’를 지혜롭게 실천해낸 것이다.
라이스테라스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질서정연한 자급자족의 생태계다. 어느 한 집이라도 관리를 소홀히 하면 바로 이웃집에 피해를 끼치게 된다. 게으름을 피울 수 없으니 도덕적 해이가 생겨날 수 없다. 그 결과, 실업률 제로의 완전고용 공동체를 만들었다. 상부상조하고 연대할 수밖에 없는 복지생태계를 만들어내었다. 기회균등의 공정한 시장을 유지하지 못하면 복지공동체가 조성될 수 없다. 반대로 부지런하고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가 유지되지 못하면 시장도 돌아가지 않는다. 소박한 사람들이 라이스테라스를 일구어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내었다. 하물며 대한민국의 머리 좋은 엘리트들이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 시스템을 왜 못 만들겠는가.
최병호 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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