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 보일 감독의 1996년 영화 ‘트레인스포팅’은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인생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고 경력을 선택하라. 가족을 선택하라. 엄청나게 커다란 텔레비전을 선택하고 세탁기, 자동차, CD 플레이어, 자동 병따개를 선택하라. 건강, 저콜레스테롤, 치아보험을 선택하라. 고정금리 모기지 상환을 선택하라. 생애 첫 주택을 선택하라. 친구를 선택하라. 편한 옷과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선택하라. 할부로 구입할 응접세트를 선택하라. DIY를 선택하고 일요일 아침 자기 실체를 의심하라. 소파에 앉아 불량 식품을 먹으며 시청할 사람 기 죽이는 게임쇼를 선택하라… 당신의 미래를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
이것이 현대인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지 단순한 이죽거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거야 당신이 선택할 문제다. 정작 문제는, 그런 것 말고도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당신은 이 글을 끝까지 읽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이해한다. 나 역시 이 글을 끝까지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매순간이 선택이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대형마트에 갔다.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대단한 쇼핑을 하려던 건 아니다. 미역, 달걀, 두부, 간장 등의 간단한 식자재와 세제, 물티슈 같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필요했을 뿐이다. 마트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있었지만 ‘간단한’ 식자재와 ‘단순한’ 생활용품은 없었다.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꼈다. 현명하지 못한 남편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현명하지 못한 아내가 되기는 싫은데?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야 해! 스마트폰으로 검색도 해보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똑같은 제품을 두고 누구는 최고라고 했고 누구는 쓰레기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에서 무엇을 참고해야 할지 좀처럼 선택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얼어붙는 게 비단 우리 부부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결정장애니 선택장애니 하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선택지가 많다는 사실이 아니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쓴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의 말이다. 고도로 발달된 소비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합리적 선택의 문제로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가 열심히 계속해서 찾기만 한다면,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기만 한다면 완벽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상실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인생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 걷는다는 건 다른 길은 걷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의 완벽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완벽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선택은 훨씬 힘들어진다. 선택은 압도적인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선택을 잘못했을 때 발생할 죄책감과 불안, 후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선택의 독재적 측면에 기여한다.”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불안감과 부족감(부적절하며 남보다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만든다.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감과 부족감 또한 우리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믿게 만든다. 완벽한 선택이라는 환상. 그 속에서 소비되는 건 우리의 삶이다. 살레츨은 선택이 개인적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궁극의 수단으로 찬양될 때 사회적 비판의 여지는 사라지고 만다고 지적한다. 선택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으며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살레츨은 책의 한 부분에서 새뮤얼 존슨의 문장을 인용한다. 좋은 선택이다. 그래서 나 역시 새뮤얼 존슨을 인용하며 이 글을 끝내기로 선택했다. 이런 문장이다. “어떤 인생을 선택할까 궁리하느라 살아가는 일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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