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채권 골라 매입해 없애줘
악랄한 채권추심 사회적 환기를"
은행 출범 후 37억원 기부 받아
2000명 빚의 굴레서 벗어나게 해
"기회 얻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면
소득·소비 활동으로 내수 살아나"
은행이 빚을 갚아준다. 게다가 이 은행은 돈이 안 되는 채권만 골라 산다. 지난달 27일 ‘사람 살리는 착한 은행’을 구호로 출범한 이 은행, ‘주빌리 은행’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요즘 많다.
주빌리 은행은 ‘은행’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여타 은행처럼 여ㆍ수신 업무를 하지 않는다. 실은 부실채권 시장에서 부실채권을 넘어선 ‘악성채권’을 골라 매입해 없애는 일이 주요 업무인 비영리단체다. 빚으로 고통 받는 채무자들에게 상담도 해준다. 발단은 2012년 미국 시민단체 ‘월가를 점령하라’가 시작한 채무 탕감 운동 ‘롤링 주빌리 프로젝트’였다. 소비자운동을 하는 사단법인 희망살림이 지난해 4월 롤링 주빌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던 중, 경기 성남시와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힘을 합쳐 주빌리 은행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유 교수가 초대 은행장을 공동으로 맡고 있다. ‘주빌리’는 일정 기간마다 죄를 사하거나 채무를 탕감해주는 기독교적 전통이다.
21일 만난 유 교수는 “악성채권 때문에 통장 개설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 재기의 기회를 얻도록 하기 위한 취지”라고 주빌리 은행의 설립 목적을 설명했다. 유 교수는 “주빌리 은행이 이들 모두를 구제할 수 없다”며 “주빌리 은행을 통해 부실채권 거래시장의 실태와 악랄한 채권추심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를 마련하겠지만 종국에는 우리 같은 민간이 아닌 정부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채권이 통상 3~6개월 이상 연체되면 이를 손실 처리하고 대부업체에 헐값에 팔아 넘긴다. 은행에서 크고 작은 대부업체로 넘어가는 채권은 원금의 1~10% 수준. 유 교수는 “은행들도 돈을 빌려준 ‘채권자의 책임’이 있는데 채무조정 등 최소한의 절차 없이 이들을 너무 쉽게 벼랑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일각에선 소멸시효(5년)가 완료된 채권을 팔아 넘기는 꼼수도 서슴지 않는다. 올해 초 SBI저축은행이 대부업체에 매각하려던 부실채권의 87%가 소멸시효가 지난 게 확인돼 논란이 일었던 게 대표적이다.
이렇게 부실채권을 사들인 대부업체는 채무자들에게 빚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곤 한다. 돌려 막기를 하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현재 대부업체로부터 채권추심을 받는 채무자는 111만명으로 추산된다.
주빌리은행이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대부업체로부터 채권을 기부 받아 소각하는 방식이다. 주빌리은행은 출범 직후 원금 37억원에 해당하는 채권을 한 대부업체로부터 기부 받아 2,000명이 빚을 털었다. 유 교수는 “자신들 시장을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에 협조적인 대부업체는 아직까지 소수”라고 말했다. 다음은 후원계좌를 통한 기부금으로 부실채권을 직접 매입하는 방식이다. 최근 원금 70억원어치 채권을 기부금 5,200만원으로 샀다. 후원계좌를 통한 기부로는 한계가 있어, ‘채권소각 챌린지’ 같은 모금 이벤트를 벌이는 것도 검토 중이다.
이렇게 매입한 부실채권 채무자에겐 “형편이 닿는 대로 갚으라”라고 통보한다. 유 교수는 “주로 원금의 7%를 권유한다”고 말했다. “부실채권 시장에서 채권들이 얼마나 ‘땡처리’ 되는 지 강조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 돈을 모아 또 다른 채무자의 부실채권을 사는 재원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떤 방식이든 소액이면서 장기 연체 채권을 매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생계형 채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를 우려하는 시각에 유 교수는 “주빌리은행 모델이 오히려 경제적”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악성채권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고, 이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해서 소득이 생기고, 소비를 하고, 내수가 살아나는 게 더 ‘경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문제해결 방법”이라며 “채무자에게 입은 손해에 집착하면 결국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 복지와 건강보험에 부담이 되고, 극단적 선택을 하든지 범죄자가 되든지, 사회적 부담으로 돌아온다”고 지적했다.
송옥진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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