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쿨해지는 오늘날 ‘데이트’는 구태의연하다. 젊은 세대는 데이트하는 연인이 되기 전 미묘한 ‘썸’을 갈구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원나잇’이나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과 회합하는 ‘번개’처럼 필요에 의한 즉석 만남도 갖는다. 이런 이들에게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격화하는 데이트는 고루하고 번잡한 악습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데이트도 처음 만들어질 때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데이트는 1920년대 산업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미국 사회의 발명품이다. 그 전까지 남자는 여자의 집을 방문해 만났다. 남자가 방문 의사를 타진하면 여자가 허락하고, 대략 2주 뒤에 남자가 여자의 집을 찾아가 여자와 그 어머니를 만나 인사한 후 헤어졌다. 경직적인 방식이기는 하나 방문하는 남성과 응하는 여성은 복잡하고도 안전한 절차를 거쳐 서로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만남의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데이트의 탄생’의 저자 베스 베일리는 데이트가 방문보다 진보한 방식이라 말하지 않는다. 단지 변화된 사회상이 새로운 관습의 발명을 낳았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도래로 도시 하층민들의 집은 방문할 수 없을 만큼 좁았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집 밖에서 만남을 시작했다. 폭발적으로 성장한 대중문화, 즉 영화관 식당 카페가 데이트 거리를 제공해줬다. 베일리는 방문에 비해 데이트가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중산층이 데이트 문화에 열광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자유의 대가는 비쌌다. 젊은 연인들 특히 남성 쪽은 데이트를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또 데이트는 만남을 드러내 놓는 공개적인 활동이었기에 ‘누구와 데이트를 했는가’가 연애시장에서의 평판과 직결됐다. 곧 데이트는 연애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을 촉발시켰다.
데이트로 인해 새로운 권력 구도도 발생했다. 지금까지도 데이트 비용은 대개 남자가 치르는데, 결국 남자가 돈을 주고 여성과의 교제를 사는 구조다. 여성은 남성에게 데이트의 주도권을 맡기고 끌려간다. 동시에 지불 능력이 없는 남성에겐 데이트를 할 자격도 상실하기 때문에 이런 구도가 남성에게 꼭 유리한 것도 아니다. 이와 함께 ‘여자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해선 안 된다’거나 ‘남자가 여자를 집 앞까지 바래다 줘야 한다’는 규칙이 형성되면서 데이트는 양성의 역할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데이트 시스템은 미국에서 1960년대 성 해방과 함께 붕괴했다. 그 자리를 자유로운 성관계가 차지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 전통적인 데이트의 힘이 남아있는 편이고, 결부된 문제도 여전하다. 젊은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위해선 전통적인 성 역할 구도의 부조리를 감수해야 한다. 데이트 시장에서 탈락하는 이들은 자유로운 성관계 내지는 썸을 대안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다시 확인해 주듯 새로운 관계가 꼭 진일보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그저 관계 형성 방법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람들은 그 변화에 적응할 뿐이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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