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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없어서 더 빛나다… 수동식 기계들의 진가

입력
2015.09.2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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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까는 장치와 페달식 세탁기, 전기 만드는 축구공…

사람 손·발과 중력으로 전기 사정 안 좋은 개도국서

시간 아끼고 일손 더는 역할 톡톡…몸 움직여 작동시키는 적정기술

베트남 산간 오지 찌에우응웬 마을에서는 수동식 풀무를 이용해 옥수수 알갱이에서 먼지를 제거한다. 홍성욱 교수 제공
베트남 산간 오지 찌에우응웬 마을에서는 수동식 풀무를 이용해 옥수수 알갱이에서 먼지를 제거한다. 홍성욱 교수 제공

필자는 8월 ㈜효성과 기아대책이 운영하는 효성블루챌린저 대학생 적정기술봉사단과 함께 베트남 산간마을에서 적정기술 제품 개발을 위한 사용자 조사를 실시했다. 일행이 방문한 곳은 하노이에서 북동쪽으로 차를 타고 7시간 정도 걸리는 까오방성 응웬빈현 찌에우응웬 마을로 자오족 눙족 흐몽족 등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여정 중간에 박칸에서 잠시 쉬고 산을 4개 넘어서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찌에우응웬 마을로 들어가는 언덕길에 도달했는데, 길가에 있는 민가 마당에 옥수수 알갱이가 널려 있고 그 옆에 기계가 한 개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길이 좁아 그곳에서 버스를 돌려야 했기에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서 그 기계를 살펴봤다.

응웬빈현 주민들은 주로 옥수수 농사를 지어 옥수수 알갱이를 말려서 빻아 쑨 죽을 주식으로 삼는다. 이 기계는 건조한 옥수수 알갱이에서 이물질을 제거하는 수동식 풀무였다. 찌에우응웬 마을은 중국과 국경지대에 위치한 산간 오지마을이어서 전기 사정이 매우 안 좋다. 그래서 주민들은 전기를 사용하는 자동식 풀무 대신에 손으로 핸들을 돌려서 먼지를 제거하는 수동식 풀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노이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까오방성 중심부에 있는 시장에서도 말린 옥수수대에서 옥수수 알갱이를 떼어내는 수동식 기계가 1만원 미만의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인력을 이용한 기계는 사람이 있는 곳 어디서나 사용 가능한 매우 좋은 적정기술 제품이다.

땅콩 껍질 제거장치인 유니버설 너트 셸러. 풀 벨리 프로젝트 홈페이지 제공
땅콩 껍질 제거장치인 유니버설 너트 셸러. 풀 벨리 프로젝트 홈페이지 제공

손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적정기술

앞서 언급한 옥수수 알갱이에서 먼지를 제거하는 기계, 옥수수대에서 알갱이를 떼어내는 탈곡기 등과 같이 손으로 핸들을 돌려 동력원을 얻는 적정기술 제품은 많다. 족 브란디스가 2001년에 개발한 땅콩껍질 제거기인 ‘유니버설 너트 셸러(Universal Nut Sheller)’도 이와 유사한 적정기술 제품이다. 2001년 아프리카 말리에 있는 어느 마을에 정수장치를 고치기 위해서 방문한 브란디스는 마을의 한 여성으로부터 땅콩껍질 제거기를 만들어주면 유용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미국으로 돌아온 브란디스는 불가리아에서 사용되는 땅콩껍질 제거기에 대해서 알려준 팀 윌리엄스 박사 등의 도움으로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유니버설 너트 셸러(개발 당시 이름은 말리 땅콩 셸러였다)라고 불리는 땅콩껍질 제거기를 개발하였다. 이 제품의 가격은 50달러 정도다. 2003년 브란디스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 출신들과 함께 개발도상국에 적정기술을 보급하기 위한 비영리단체인 ‘풀 벨리 프로젝트(Full Belly Project)’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유니버설 너트 셸러 보급에 나섰다. 브란디스는 이 제품으로 2006년에 파퓰러 메카닉스(Popular Mechanics)로부터 혁신 대상을 수상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도 손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적정기술 제품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필자는 아침식사로 베이글 등과 함께 드립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 원두를 갈기 위해서 전기를 사용하는 분쇄기 대신에 손으로 핸들을 돌려서 원두를 분쇄하는 수동식 기계를 사용한다. 지난달에 대전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고등학교 기술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적정기술에 관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매우 반가운 기계를 발견했다. 요즈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칠판 지우개에 있는 분필 가루를 제거하기 위해서 전기로 작동되는 기계를 사용하는데, 이곳에서는 손으로 돌려서 분필 가루를 제거하는 기계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 밭에 물을 대기 위한 힙 펌프(본보 8월 10일자 21면 참조)도 손을 이용한 적정기술 제품이다. 이와 대비해서 보다 넓은 면적에 물을 대기 위해서 사용하는 머니메이커 펌프는 발을 사용해서 동력을 얻는 적정기술 제품이다.

발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적정기술

미국 서부 로스앤젤스에 위치한 아트센터디자인대학(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 재학 중이던 유지아와 알렉스 카부녹은 2011년 디자인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서 방문한 페루의 리마에 있는 빈민촌에서 현지 여성들이 빨래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들을 위해서 디자인한 제품이 전기 없이도 사용 가능한 수동식 세탁기인 ‘기라 도라(Gira Dora)’이다. 이 세탁기는 원통 모양의 플라스틱 통으로 제작되어서 가볍고, 판매시 예상 가격은 40달러 정도다. 이 세탁기는 세탁기 뚜껑 위에 앉아서 발로 페달을 밟아서 작동시키며, 앉아있는 동안 불편하지 않도록 뚜껑에 쿠션이 설치되어 있다.

페달을 밟아서 사용하는 세탁기인 더 드러미. 이레고 홈페이지
페달을 밟아서 사용하는 세탁기인 더 드러미. 이레고 홈페이지

기라 도라의 사용법은 매우 간단하다. 먼저 빨랫감을 기라 도라 본체에 넣고 물을 붓는다. 적당량의 세제를 넣은 후에 뚜껑을 닫고 뚜껑 위에 앉아서 페달을 밟는다. 세탁이 끝나면 배수 플러그를 통해서 물을 배출한다. 기라 도라는 원심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세탁뿐만 아니라 탈수도 가능해서 빨랫감의 건조 시간도 대폭 줄일 수 있다.

발로 페달을 밟아서 동력원을 얻는 페달식 세탁기는 선진국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이레고(www.yirego.com)에서는 ‘더 드러미(The Drumi)’라는 수동식 세탁기를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다. 작동 원리는 기라 도라와 유사한데 더 드러미의 가격은 15만원 정도이다. 이레고는 이 제품으로 2015년에 제임스 다이슨 어워드를 수상했다.

발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적정기술 제품들 중에는 자전거를 사용한 것이 많이 있다. 자전거 페달을 돌려서 전기를 생산한 후에 이를 축전지에 저장하였다가 가정에서 필요한 전기기구들을 구동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은 가장 일반적인 자전거 활용법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손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적정기술 제품들은 디자인을 적절히 변형시키면 자전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제품으로 개조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생이 탄자니아 아루샤에 설립한 ‘글로벌 사이클 솔루션(Global Cycle Solution)’에서는 자전거를 이용해서 옥수수 알갱이를 떼어내는 적정기술 제품을 개발해서 보급했다.

자전거를 사용한 분뇨 펌프. 새너지 홈페이지
자전거를 사용한 분뇨 펌프. 새너지 홈페이지

새너지(Sanergy)는 MIT 경영대학원생이던 데이비드 아워바크와 아니 발라바네니가 케냐 빈민가의 심각한 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2010년에 창업한 벤처 기업이다. 새너지는 ‘프레시 라이프 토일렛(Fresh Life Toilet)’이라고 불리는 콘크리트 화장실을 200달러 정도의 저렴한 비용을 들여서 건축하고, ‘프레시 라이프 오퍼레이터’라고 불리는 풀뿌리 사업자들에게 화장실을 임대하여 운영하게 한다. 여기서 모아진 분뇨는 처리 시설로 옮겨져서 유기 비료로 전환되고 이를 통해서 수익이 발생하게 된다. 한편 새너지의 네이크 샤프는 화장실에 모아진 분뇨를 끌어올리는데 사용할 목적으로 ‘새너지 사이클(Sanergy Cycle)’라는 자전거 이용 펌프를 개발하였다. 샤프는 글로벌 사이클 솔루션(Global Cycle Solution)에서 제작한 자전거를 이용한 옥수수 알갱이 제거 장치를 개량해서 이 펌프를 개발하였다. 사용자는 화장실에 호스를 넣고, 10~15분 동안 자전거를 타면 25리터 통에 분뇨를 가득 채울 수 있다.

한국의 특허청에서도 2013년 ‘지식재산 나눔사업’의 일환으로 자전거 바퀴에 로프와 파이프를 연결해서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워터펌프를 개발해서 파푸아뉴기니에 보급했다. 자전거를 사용하면 손으로 돌리는 로프 펌프에 비해 8분의 1의 힘만으로도 물을 길 수 있고 자전거에 로프와 파이프를 설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20분에 불과하여 여러 곳으로 이동하면서 사용 가능하다.

발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다소 독특한 적정기술 제품으로 ‘소켓볼(Soccket Ball)’도 있다. 줄리아 실버만과 제시카 매튜스는 하버드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8년 공학수업시간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가정에서 전등이 없어서 밤에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면서 빛도 얻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들이 공동 개발한 소켓볼은 30분 동안 가지고 축구를 하면 약 3시간 동안 LED 전등을 킬 수 있는 축구공이다. 소켓볼 안에는 유도코일센서가 내장되어 있어서 진동을 시키면 전기를 발생시켜서 이를 배터리에 저장한다. 무게는 일반 축구공에 비해서 30g 정도밖에 더 나가지 않는다. 실버만과 매튜스는 소켓볼을 판매하기 위해서 비영리단체인 ‘언차터드 플레이(Unchartered Play)’를 2011년에 설립하였다. 2013년에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킥스타터를 통해 진행되었던 소켓볼에 대한 펀딩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제품에 대한 결함이 발견되었고, 이들은 이런 문제점을 수정해서 2014년 말에 소켓볼Ⅱ를 99달러에 새로이 출시하였다. 이들은 또한 줄넘기를 하면서 충전을 할 수 있는 ‘펄스’라는 이름의 줄넘기도 99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중력을 이용한 LED 전등인 그래비티 라이트. 그래비티 라이트 홈페이지 제공
중력을 이용한 LED 전등인 그래비티 라이트. 그래비티 라이트 홈페이지 제공

중력을 이용한 적정기술 제품

중력도 매우 중요한 동력이다. 앞서 소개한 ‘점적 관개시설’(본보 8월 10일자 21면 참조), ‘세라믹 워터 필터’와 ‘바이오샌드필터’(6월 1일자 22면 참조)가 모두 중력을 활용하는 적정기술 제품이다.

2013년 짐 리브스와 마틴 리디포드는 중력을 이용한 전등인 ‘그래비티 라이트(Gravity Light)’를 개발하고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인디고고를 통해서 펀딩에 성공하였다. 그래비티 라이트의 작동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모래주머니에 모래를 넣고(약 12㎏) 사람 키 높이로(약 1.8m) 들어올린 후에 손을 놓는다. 모래주머니가 아주 서서히 내려오면서(약 1초에 1㎜) 스프로켓(Sprocket)이라고 불리는 장치를 높은 토크로 천천히 돌리면, 제품 안에 설치된 고분자 기어트레인이 이를 전달받아 낮은 토크로 빨리 돌면서 전기를 생산하는 원리이다. 이렇게 생산된 전기를 통해서 LED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모래 주머니를 다시 들어올리면 전기가 다시 생산되도록 설계돼 있다. 현재 이들은 첫번째 모델인 GL01의 문제점을 보완한 두번째 모델인 GL02를 개발 중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흐르는 냇물에 발전 터빈을 설치하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데, 1m 정도의 작은 낙차를 이용해서 200~300W 정도의 전기만 생산해도 개도국에 있는 한 가정에서 사용하기에 충분하다.

매년 여러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안 및 보급한 단체에 수상하는 아쉬든 어워드라는 상이 있다. 올해 수력 부분에서는 파키스탄 북쪽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 지역에서 소수력을 보급하고 있는 단체인 사하드 루럴 서포트 프로그램에서 수상했는데, 이 단체는 2004년 이후 190여개의 소수력 장치를 설치해서 37만명의 사람들에게 전기를 공급했다.

수동 분필 먼지털이기. 홍성욱 교수 제공
수동 분필 먼지털이기. 홍성욱 교수 제공

인력을 이용한 적정기술 제품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개도국에서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적용될 수 있다. 개도국에서는 여가 시간이 많으므로 유휴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 자전거 등을 사용해서 에너지 전환 효율을 높인 경우에는 더욱 적용하기가 수월하다. 개도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인력을 사용한 적정기술 제품이 지금보다 폭넓게 사용될 수 있다. 선진국에 사는 현대인들은 과잉 영양 섭취 및 부족한 운동으로 인하여 비만 등의 질병에 걸리는 것을 항상 염려하고 산다. 하지만 우리의 몸을 움직여서 작동시키는 적정기술 제품을 생활 속에서 늘 사용한다면 이런 걱정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동력을 활용한 적정기술 제품이야말로 우리의 건강도 지키고 지구의 지속가능성도 확보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술이라고 하겠다.

홍성욱·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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