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선전 전문가, 나치 선동꾼 괴벨스의 마음을 사로잡다

알림

선전 전문가, 나치 선동꾼 괴벨스의 마음을 사로잡다

입력
2015.09.20 09:39
0 0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조카

삼촌의 이론 군중심리학과 결합해 자본주의 홍보·선전 이념 만들어

이익 위해 과테말라 정부 전복도… '美 부르주아 상업적 확성기' 평가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1995)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며 현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인 홍보 및 선전 분야의 개척자이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그를 ‘PR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제너럴 일렉트릭 및 제너럴 모터스와 같은 제조업체 및 담배 회사, 비누 회사 등과 같은 다양한 기업은 물론이고 예술가, 연예인, 정치인 및 미국 정부를 위해서 일했으며, 특히 다국적 농산물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과테말라의 민주 정부를 전복시키는 일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공공 여론을 결정화하기’(1923) ‘PR 자문’(1927) ‘프로파간다’(1928) 등이 있다.

버네이스의 어머니는 정신분석학을 창설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며, 또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트의 처남이다. 즉, 프로이트는 그의 외삼촌이자 고모부가 되며, 프로이트의 아내 마르타 버네이스는 그의 외숙모이자 고모가 된다. 20세기 미국 사회 및 현대 자본주의에 끼친 실질적인 영향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버네이스에 비하면 별 거 아니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버네이스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서 만 한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하고 뉴욕에서 자라서 뉴욕이 사실상 그의 고향이었다.

여성 흡연을 ‘자유의 횃불’로 선전

버네이스는 프로이트의 책을 미국에서 번역, 간행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프로이트의 명성을 이용해서 자기의 경력을 부풀려나갔다. 그는 프로이트 이론을 구스타프 르봉 등의 군중심리학과 결합시킴으로써, 현대 자본주의의 홍보 및 선전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자 했다. 그는 PR 분야의 실무전문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프로파간다 분야의 전문적 사상가로 자기 스스로를 세팅해낸 것이다.

버네이스는 언론사를 위한 보도자료의 배포를 홍보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일을 개척적으로 활용했다. 물론 보도자료의 배포는 이미 미국 현대 PR의 창설자인 아이비 리(1877~1934)의 선례가 있었지만 아이비 리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PR 분야에서 버네이스만큼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독일 나치 선전 장관인 괴벨스는 나치의 악명 높은 유대인 박멸 캠페인을 해가는 버네이스의 책 ‘공공 여론을 결정화하기’를 기초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계였던 버네이스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겠지만 버네이스 자신은 이 사실을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자랑 삼아 소개하기도 했다.

버네이스가 선보인 여러 프로파간다 테크닉 중에 대표적인 것은 매스컴을 이용해서 센세이셔널리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예컨대, 1920년대에 담배회사 홍보를 위해서 일할 때, 버네이스는 젊은 여성 모델들을 고용해서 담배를 피우면서 뉴욕 시가지에서 퍼레이드를 하게끔 했다. 그는 이 때 담배 회사의 매상을 위해서 여성의 공공 흡연권이라는 이슈를 내세웠으며 매스컴에다가는 여성의 흡연을 ‘자유의 횃불’이라고 선전해댔다.

“대중 조작은 민주주의의 중요 요소”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생산과정에서 만들어진 상품이 유통과정에서 팔리는가 안 팔리는가 하는 문제를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기업 및 상품의 홍보, 선전 및 마케팅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숨을 건 도약에서 기업 및 상품의 생명을 건져주고 이어나가게끔 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버네이스는 단지 기업 및 상품의 홍보 및 PR의 국부적인 테크닉을 개발하는 일을 넘어서서, 소위 조작(manipulation)을 적극적, 체계적으로 옹호함과 동시에 이를 미국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적 작동 방식과 연결시키는 이데올로기 작업까지도 해냈다.

그의 책 ‘프로파간다’는 오디언스의 소위 숨은 모티프들을 발견해내는 것에 의해서 조작과 그 조작에 바탕을 둔 프로파간다를 효과적이고도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 책의 맨 앞에서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주장한다. “대중의 조직된 습관 및 의견에 대한 의식적이고 지능적인 조작은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사회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역학을 조작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정부를 구성하며 이는 우리나라의 진정한 지배력이다. (…)예전에는 우리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주로 우리는 통치되고, 우리 마음이 만들어지고, 우리 취향이 형성되고, 우리 생각이 암시된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의 논리적 귀결이다. (…)정치 영역이든 사업 영역이든 간에, 사회 행위이든 윤리적 사고이든 간에, 거의 모든 일상생활의 활동에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사람들, 즉 대중의 정신 과정과 사회 패턴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된다.”

사적생산물과 공적관계(PR)라는 부조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및 상품의 홍보, 선전, 광고, 마케팅 등은 상품의 생산 및 소비는 물론이고 기업의 존속 및 성장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어 있기는 하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의 경우 자본주의적 대중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미 1960년대를 전후해서부터 에리히 프롬이라든가 허버트 마르쿠제와 같은 사상가들의 치열한 비판이 있어 왔다. 그 비판의 요체는, 대량생산체제에 입각한 대중소비사회는 풍요로운 소비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만 그러할뿐더러 결국 뿌리 깊고 광범위한 소외를 낳는 것이며, 특히 본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 이론에는 버네이스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1912~1994)도 프로파간다 이론을 제출하고 있다. 그런데, 엘륄의 이론은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적이고 우파적 버전이기는 하지만 사상적 주제라는 점에서는 프롬이나 마르쿠제의 소외론과 연결된다. 이에 비교한다면,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 이론은 자본주의적 광고 선전에 대한 일방적인 찬미가이며, 미국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상업적 확성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이라는 사적 조직과 그 기업이 생산해내는 상품이라는 사적 생산물은 유통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의해서 단지 사후적으로만 사회적인 것으로 승인을 받는다. 사적 생산물의 유통 및 소비를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공적 관계(퍼블릭 릴레이션ㆍPR)’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러한 사적 성격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매우 황당하고도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원래 퍼블릭(public)이라는 말은 국가라든가 공적 정치 및 사회의 영역에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다르고 특별해질 수 없는 시대

‘PR’만큼이나 황당한 이름을 갖는 게 바로 오늘날의 소위 ‘소셜 미디어’다. 소셜 미디어들은 실상 사회적이지 않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그것은 도리어 퍼스널하며 사적이다. 다만 기존의 매스미디어와 비교할 때 소위 소셜 미디어라는 것이 쌍방향적이고 네트워크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단지 상대적인 이점을 갖는 것일 따름이다.

사회라든가 관계라는 말을 서로 연결지어 연상을 해나갈 때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장이다: “그 현실태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그런데,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라는 점에서 굳이 마르크스의 직업을 따져본다면, 그것은 저널리스트라고밖에 할 수가 없는데, PR이라든가 광고, 선전 혹은 마케팅이 기업이나 상품의 목숨을 건 도약을 좌지우지하게 될 줄은,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마르크스로서도 19세기 중반의 시점에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이제 모든 개인을 아주 치열하게 스스로를 광고, 홍보, 선전하는 존재로 만들어 내고 있다. 실상 대부분의 개인들은, 기업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에서 스스로를 소개할 때 그러하듯이 ‘비빔밥’으로 표현하는 바와 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이 이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증하기 위해서, 블로그‘질’을 하고, 먹기 전에 반드시 음식을 찍어 올리고, 새로 구입한 ‘신상’과 운 좋게 얻어낸 ‘득템’을 자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남과 달라질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서로 달라지고 특별해진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앤디 워홀이 1960년대에 예언했듯이, 어느 누구든지 15분 동안 유명해질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은 1분 30초도 그렇게 안될 것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