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소설가들이 모여 희귀병 어린이를 위한 바자회를 연 적 있다. 다들 갖고 있던 옷이며 액세서리 등을 들고 나와 좌판을 벌였다. 딱히 팔 게 없던 나는 작심하고 즉흥시를 써서 팔았다. 키워드 세 개만 제시하면 시를 한편 지어주었다. 편당 5,000원. 그걸 누가 사겠냐 싶었지만 웬걸, 서너 시간 동안 열다섯 편을 썼다. 주문한 이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를 키워드와 연결시켜 연습장에 초고를 작성한 뒤, 편지지에 정서해서 봉투에 담아주었다. 번잡한 시장판(?)임에도 이상한 집중력이 생겼다. 제시 받은 키워드를 따라 공간 한가운데 나만의 작은 방이 생긴 것 같았다. 타인에 의한 작의가 외려 더 본원적인 내 의지로 변형되는 순간이랄까. 내 기준과 기분에 맞춰 시를 쓸 때와는 많이 달랐다. 당연히 헛짚기 일쑤겠지만, 단어 몇 개만 들고 잠깐 눈을 맞춘 사람의 영혼 속을 탐사하는 기분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어조, 다른 호흡, 다른 색조를 띈 글들이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힘들면서도 기꺼웠다. 호기심이었든 장난이었든, 툭툭 던져준 단어들이 일반 용례와는 무관하게 어설프나 간곡한 공명으로 종이에 불시착했다. 이거 누구 시지? 내가 쓴 거 맞나? 매번 헷갈렸다. 그러곤 탈진했다. 집에 돌아와 연습장에 속기한 초고들을 두루 살펴봤다. 타인의 눈으로 이리저리 파헤쳐 본 내 영혼의 해부도 같았다.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