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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망각…기억… 지독한 상처의 종착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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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망각…기억… 지독한 상처의 종착지는

입력
2015.09.1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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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공유 안 되는 노부부 통해 망각의 효용과 기억의 고통 대비

개인·국가 향해서도 정체성 질문…유고 내전과 르완다 학살에서 영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ㆍ하윤숙 옮김 · 시공사 발행ㆍ480쪽ㆍ1만4,500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ㆍ하윤숙 옮김 · 시공사 발행ㆍ480쪽ㆍ1만4,500원

도깨비가 암약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용의 입김이 안개가 돼 평원을 뒤덮은 고대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용을 무찌르려는 전사가 나오고, 전사들의 결투와 도깨비에 물려 환각증세를 보이는 소년이 나온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의 외피를 띤 이 픽션이 하나의 우화일 것이라는 짐작은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이름이 불러 일으키는 필연적 연상작용이다. 이 우화가 의미하는 원관념을 파악하려 탐침을 곧추 세우고 읽다 보면, 어떤 시대의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실의 슬픔으로 귀결되는 그의 일관된 정조에 이내 감염된다.

‘남아 있는 나날’로 1989년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일본계 영국작가 이시구로는 30년 넘는 작가 생활 동안 단 여섯 권의 장편과 한 권의 단편집을 펴냈다. 탐정물과 공상과학소설 등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형식적 변주를 펼쳐왔지만, 서사보다 인물의 내면 풍경이 승한 소설들을 써왔다. 그가 10년 만에 펴낸 신작으로 올 봄 영미 문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파묻힌 거인’은 망각의 안개로 자욱한 판타지의 공간 속에 슬픔으로 흥건한 질문 하나를 공명시킨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서로의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망각의 효용과 기억의 고통을 대비시키며 개인과 사회, 가족과 국가를 향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묻는 소설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한시도 떨어지지 못할 만큼 사랑이 깊은 브리튼족 노부부. 암용 케리그가 내뿜는 안개로 인해 기억을 잃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봄날, 날카로운 기억의 편린이 액슬을 할퀸다. ‘우리에게는 아들이 있었다’는 희미한 기억. 저 먼 어느 마을에서 사는 아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비밀스런 결심은 언젠가 아내가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이 끝내 반대했던 것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소설 ‘파묻힌 거인’에 대해 가디언은 “기억과 죄책감에 대해, 우리가 집단 차원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게 파헤친 소설”이라며 “기억하라는 의무에 충실하려는 사람과 빨리 잊으려는 사람에 관한 아름답고 가슴 아픈 이야기”라고 평했다. 시공사 제공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소설 ‘파묻힌 거인’에 대해 가디언은 “기억과 죄책감에 대해, 우리가 집단 차원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게 파헤친 소설”이라며 “기억하라는 의무에 충실하려는 사람과 빨리 잊으려는 사람에 관한 아름답고 가슴 아픈 이야기”라고 평했다. 시공사 제공

노구를 이끌고 위험한 여정에 나선 부부는 폭풍우를 피하러 들어간 어느 폐가에서 뱃사공 남자를 만난다. 그가 사람들을 날라다 주는 일을 했던 섬은 수백 명이 살고 있지만, 서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다들 홀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곳이다. 한번에 한 사람밖에 데려다 줄 수 없는 그 섬에 가기 위해서는 뱃사공이 묻는 질문에 각기 똑같은 대답을 내놔야 한다. 둘 사이에 가장 소중한 기억을 뱃사공 앞에 제시해야만 강한 사랑의 유대를 증명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섬으로 건너갈 배를 탈 수 있는 자격이 된다. 결코 헤어질 수 없으나 지난 일이 기억나지 않는 노부부의 내면에 불안이 엄습한다.

소설은 노부부의 여정에 색슨족과 브리튼족의 살육전쟁, 헌신했던 이민족 전사에 대한 차별과 배척, 배신과 음모, 복수와 전쟁 등 다양한 모험서사를 삽입해 기억과 망각이라는 작품의 주제 반경을 넓힌다. 색슨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헌신과 용맹을 무참히 짓밟힌 후 브리튼족을 배신하게 되는 전사 위스턴, 아서왕의 조카로 브리튼족의 영예를 위해 망각의 용을 지키려는 기사 가웨인 경, 용에 물린 상처의 냄새로 용을 불러들이는 미끼가 됐지만 실은 빼앗긴 엄마를 찾기 위해 술수를 부리고 있는 소년 에드윈. 각각의 인물들은 판타지의 스펙터클을 구현함과 동시에 기억이냐 망각이냐의 서사적 혈투를 벌인다.

겁에 질린 아련한 말투로 신비와 슬픔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대사는 이 소설의 백미다. 마지막 챕터를 읽기 위한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반전의 세기가 큰 이 작품은 그토록 사랑함에도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된 관계에 대해 오래 생각하도록 만든다. 용서할 수 없다면 망각해야 하는가, 기억하는 한 용서할 수 없는가. 마침내 뱃사공의 질문 앞에 선 노부부에게 생살점이 떨어져나갔던 자리가 선명한 상흔을 드러낸다. 함께 저 섬에 갈 수 있을까.

“잘못된 일이 그냥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는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젊은 전사 위스턴의 입을 빌어 소설이 던지는 이 묵직한 질문은 비단 사랑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미국공영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유고 내전과 르완다 대학살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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