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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청년 운운한 노동개혁에 ‘배달수 법’은 없다

입력
2015.09.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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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수목드라마 '어셈블리'의 주인공 진상필(정재영 분)은 빨간 조끼를 입고 해고 투쟁을 벌이던 용접공이다. 그는 집권 여당인 국민당의 전략공천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진상필이 이렇게까지 ‘진상’이 될 줄 알았다면 그를 공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걸핏하면 ‘국민’타령에, 정치공학 따지는 동료 의원들에게 시비를 건다. 당리당략에 따르지 않는 진상필이 국민당 입장에선 그야말로 ‘진상’ 국회의원이다. 그런 그가 “목숨 걸고 내놓은 법”이 바로 ‘배달수 법’이다.

배달수는 죽은 그의 동료다. 배달수(손병호 분)는 해고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크레인에 올랐다가 추락해 사망했다. 그는 “이 땅엔 발 디딜 곳이 없어서” 그 높은 고공으로, 그 크레인으로 절뚝거리며 사다리를 올랐다. 진상필이 내놓은 ‘배달수 법’은 배달수 같은 사람들이 디딜 땅 한 쪽이다. 진상필은 “만약에 그 사람(배달수)한테 단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어졌다면은, 아니 그런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믿음만 있었더라면 제 생각에는 그 높은 크레인 위로 올라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해고자와 실직자를 지원하는 ‘배달수 법’은 “이 땅의 평범한 아버지들을 위한 법”이기도 하다.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국회의원 진상필이 '배달수 법'을 발의하며 코피 투혼을 펼치고 있는 모습. 방송화면 캡처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국회의원 진상필이 '배달수 법'을 발의하며 코피 투혼을 펼치고 있는 모습. 방송화면 캡처

이런 법이 현실의 ‘어셈블리(국회)’에서 나타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는 해고자 만드는 노동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3일 노사정 위원회의 대타협을 시작으로, 일반해고,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를 포함해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 등을 포함한 노동개혁 5대 법안이 국회로 넘어갈 예정이다. 지난해 말,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정규직 과보호론’을 꺼낸 것이 노동개혁의 시작이었다. 정규직 보호가 너무 심해서, 기업이 겁이 나서 새 인력을, 특히 청년층을 새로 뽑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자식과 부모 간의 일자리 싸움 프레임이 여기까지 왔다. ‘해고로 실업을 막자는 이상한 이야기’가 부모 자식 간의 양보로, 미덕으로 왜곡되고 있다.

2012년 12월 2일, 당시 대선 후보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방송 연설을 통해 “지금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어른이 줄어들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다며 “근로자 정년을 60세로 연장하고, 해고요건 강화 등의 제도적 보호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일방적 그리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방지할 사회적 대타협 기구의 구성을,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정규화, 비정규직 차별 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을 약속했다(▶ 방송 연설 전문). 그리고 2년 뒤 최경환 부총리는 “한 번 뽑으면 60세까지 정규직을 보장하니 기업이 겁이 나 정규직을 못 뽑는 상황”이라며 “정규직에 대한 해고 요건 완화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정부라고 믿기 힘든 태도 전환이다. 가장 큰 반전은 ‘국민 대통합’을 이루겠다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정부는 일자리 싸움을 세대 싸움으로,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역)’를 공익광고에 등장시켜 장그래와 오과장의 싸움으로 만들었다. 분열로 국민을 설득했다. 어셈블리의 진상필은 “용접 같은 정치”를 말한다. 쇳덩어리도 붙이는 용접공처럼, 정치인은 분열된 사회를 조각조각 이어 붙이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 사회엔 첫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한 청년들과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한 기성세대가 있다. 누군가에게서 기회를 뺏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양보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을까? 누가 더 불쌍하고 불리한가를 따지는 것이 옳은가? 이 땅에 발 디딜 데 없어 고공으로 올랐다는 이 사회의 수많은 ‘배달수’에게 물어볼 일이다.

노동개혁에 대한 노사정 합의안은 노사가 저성과자 해고, 취업 규칙 개정 등에 ‘충분한 협의’를 통해 결정할 것을 명시했다. 그리고 ‘주 52시간(+특별연장근로 8시간)’근무를 통해 현행 주 68시간의 근로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첫째로, 회사와 노동자로서 권리를 따지며 ‘충분한 협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까? 무노조 사업장 근로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1800만이다. 노조가 있는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지인은 “노조 비슷한 게 있지만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충분한 협의’를 못 거친 저성과자 해고는 어떤 삶을 만들어낼까. ‘저성과’의 낙인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더 열심히 야근하고 더 열심히 사생활을 희생해야 할 것이다. 면접 때 ‘출산 계획’을 묻고, 그 출산의 공백기조차 ‘저성과’로 보고, 견디지 못하는 한국의 회사 문화를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도 잘 알 것이다.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 난임 시술에 관한 발언 중 “한 번에 애기를 낳고 빨리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쌍둥이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이야기했다. ‘저성과’의 명분은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함’일 수 있는데 이 ‘적응’이란 단어의 애매함이 지옥이 된다. ‘찍히면 죽는다’는 말은 학교, 아르바이트 사업장, 군대, 회사를 관통하는 ‘헬조선’의 명제가 아니던가.

이런 환경을 만들고 근로 시간 단축을 운운하는 게 현실적일까? 주변에 밤 10시까지 야근하는 직장인이 수두룩하다. 야근 수당 벌어서 부자 되려고 욕심들 부리는 것도 아니다. 일은 많은데, 납기일, 마감일은 맞춰야 하고, 성과 평가 잘 받아야 내년에 진급하니까 야근 수당 반납하고 밤까지 일한다. 회식 가고 회사 생활도 해야 하니 감당이 안 돼서, 일하려고 휴가 내고 집에서 일하는 ‘웃픈(웃기고 슬픈)’ 재택근무도 봤다. 나라에서 정한 근로시간대로만 일할 수 있어도 이미 ‘저녁이 있는 삶’일 것이다. 해고라는 생존의 문제를 걸고 이야기하면, 약자는 알아서 휴가도 ‘자진반납’할 수밖에 없다. 숫자로 ‘52시간’이고 ‘68’시간이고 써놓는 게 다가 아니란 소리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노총 공공부문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노동개악 저지 공공노동자 투쟁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노총 공공부문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노동개악 저지 공공노동자 투쟁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도 청년 위한 개혁이라며 ‘너희 일자리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하는 분들도 많다. 실제로 경제 5단체(전경련,대한상의,경총,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 등)는 더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자는 내용의 입법청원을 내면서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는 목적을 밝혔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다르다. 전경련의 자료에 따르면, 2015년 500대 기업의 신규채용 규모는 지난해보다 감소한 곳이 35.8%, 지난해와 비슷한 곳이 44.6%다. 증가한 곳은 19% 남짓. 이 와중에 터져 나오는 정치인들의 ‘취업청탁’ 의혹은 할 말을 잊게 만든다. 문희상, 윤후덕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비롯해 최경환 경제 부총리, 감사원 고위직 관료까지, 채용 비리 의혹 제기가 쏟아지고 있다. ‘아들, 딸 일자리 만들자’는 노동개혁 공익광고만큼이나 정재계의 개혁 의지가 진심이라면, 행동부터 보여주시라. 청년 운운한 개혁이 청년이란 이름을 동원한 개혁이 아니라면 말이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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