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서 ‘흙수저 빙고게임’이 유행하고 있다. 일명 가난 공감 놀이로, ‘화장실에 물 받는 다라이 있음’ ‘부모님이 정기 건강 검진 안 받음’ ‘여름에 에어컨 잘 안 틀거나 에어컨 자체가 없음’ ‘집에 곰팡이 핀 곳 있음’ 같은 항목이 25칸에 담겨 있다. 빙고하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는데 항목을 다 채웠다는 한 네티즌의 ‘웃픈’ 댓글에 각자 몇 줄을 그었다며 부모에게 기대기 힘든 흙수저들의 푸념이 이어진다.
최근 흙수저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이가 있으니 바로 최경환 경제부총리다. 세대 간 부(富)의 이전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상속세ㆍ증여세 부담을 완화하겠다며 11일 기획재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중장기 조세정책 운용계획’은 양극화 해소에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보였다. 구조적인 소비 부진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로의 부의 이전이 필요하다는 논리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 방법이 부자 부모 돈을 자식 세대에게 넘기겠다는 것이라니 아연실색하다. 청년들에게 괜찮은 일자리와 적정 임금을 보장하자는 방향이 아니라 세금 적게 내고 부모 돈을 물려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쪽이라니. 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이전’을 마치 노인세대에서 젊은 세대로의 ‘부의 이전’이라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최 부총리는 15일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서 한 야당의원이 금수저, 흙수저를 거론하며 결국 증여세 과세 대상자를 줄인다는 거 아니냐는 지적하자 소비 활성화를 위해서도 부의 이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왕에 편법 증여와 상속이 만연하니 양성화시키고 제도화하자고 말했다.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고착화하면서 우리사회의 양극화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득이 너무 적어 세금을 내지 않는 과세미달자를 통계에 포함하면 국민 3명 중 1명(33.64%)이 최저임금만큼도 벌지 못한다.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에 대한 개탄이 최 부총리 귀에까지는 가 닿지 않는 듯하다. 정부가 저소득층 국민에게는 눈감고 지금도 남부럽지 않게 먹고 사는 금수저들에게 조금 더 넉넉하게 쓰라고 부모 돈을 얹어 주자는 것인데, 과연 증여세가 줄면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될 만큼 부자들이 소비를 더 늘릴까. 괜스레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만 맥 빠지게 한 것은 아닌지. 청년을 핑계 삼아 부자감세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정부의 행태가 볼썽사납다.
박근혜 대통령이 노사정 대타협의 기치를 이어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뜻으로 15일 청년 고용 지원을 위한 ‘청년 일자리 펀드(가칭)’를 제안하고 첫 기부자로 나선 것 역시 박수를 받기 힘들다. 정부기관을 움직여 정책으로 큰 그림을 제시해야 할 대통령이 참모들과 사전 논의도 없이 깜짝쇼를 펼친 것부터 문제다. 청년 일자리가 펀드 조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필요하면 국가 예산을 편성해야 마땅하다. 대통령이 운을 뗀 마당이라 거국적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조짐인데 아직 구체안이 나오지도 않은 데다 이렇게 모은 돈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일지 의문이다. 청년 취업과 창업 시범사업과 청년을 고용한 기업에 대한 지원에 쓰일 예정이라지만 지금 있는 정부부처 산하 교육기관도 넘쳐난다. 청년들이 교육이 부족해서 취업을 못 하는가. 과연 기업들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고용을 늘릴까.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의무)’ 실천이라는 용비어천가도 들리지만, 오히려 정부가 더 내놓을 대책은 없다고 시인한 것 아닌가 싶어 절망감마저 든다.
성인이 되면서 누구나 노력한 만큼 가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지만 그래도 노력하며 살아가는 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흙수저들이 절망하는 사회가 과연 앞으로 뻗어 나갈 수 있을까. 현실적 여건상 어려움이 크더라도 최소한 정부의 기조는 노력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공정한 사회에 둬야 한다. 불공정한 룰을 고칠 생각은 안하고 흙수저들의 희생과 노력만 요구하니 이 나라를 지옥에 빗댄 ‘헬조선’ 같은 신조어가 나오는 것 아닌지.
채지은 기획취재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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