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 존 던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와 한국 인문학 거장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평화’를 주제로 마주 앉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는가, 아시아에는 왜 공동안보기구가 없는가 등의 난제에 두 석학이 답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가 종전 70주년을 맞아 ‘평화’를 주제로 마주 앉았다. 세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이론가 존 던(75)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와 문명비평가이자 한국 인문학의 거인인 김우창(78) 고려대 명예교수는 1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학술정보원에서 가진 한국일보 대담에서 동아시아 시민들의 화해와 용서를 촉구했다.
대담은 한국전쟁 및 동아시아관계 연구 권위자인 박명림(52) 연세대 교수가 주선하고 진행했다. 정치이론ㆍ사상 연구의 거목으로 한국 및 동아시아 현황에도 조예가 깊은 던 교수는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동아시아 평화센터와 네이버 문화재단 ‘문화의 안과 밖 자문위원회’가 16~18일 연세대 학술정보원에서 ‘동아시아와 보편평화 구상’을 주제로 개최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념 특별 국제학술회의 참석 차 방한했다. 세계 평화, 동아시아 관계, 인간의 도덕성 등 방대한 주제를 아우르는 세 지성의 대화는 3시간 넘게 이어졌다.
박명림 교수(박)=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됐다. 현재 세계의 위험과 평화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과연 세계는 평화로운가.
존 던 석좌교수(던)= 세계 각지에서 위험이 가중되고 있다. 여러 정치적 구조가 현저히 변하고 있고 과거와 다른 잔혹행위들이 인류생존을 위협하고 삶을 더 미개한 상태로 끌어내리고 있다. 한 원인은 많은 이들의 낙관과 달리 자본주의 안정성이 큰 위험에 처해있고,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막연한 낙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응집된 접근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성장이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중국의 불안감은 상승하고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하고 있다. 중미관계는 위험수준에 달했다. 이 상태의 지속은 지정학적 체제에 큰 위협을 끼칠 것이다.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만은 없는 개념이다.
김우창 명예교수(김)= 불안이 증가한다는데 동의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이 도처에서 증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마찬가지다. 불안의 한 요소는 경제발전으로 개인선택의 폭이 확장되며 불확실성이 커진 점이다. 스티븐 핑커 같은 학자는 ‘인류에서 발견되는 폭력은 과거에 비해 감소하고 있고 특히 유럽에서는 문명과 경제발전의 기여로 지난 50년간 심각한 전쟁이 없었다’고 보지만 이는 무척 낙관적인 해석이다. 경제가 발전하면 안전에 대한 희구, 유동성, 불확실성이 증가한다. 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적, 역사적 삶의 환경이다. 현재 인류의 제도는 권력, 힘, 애국심 등을 고취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자각의 영역이자 과제다. 한국은 적잖은 경제적 성공을 거뒀지만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경제발전 외의 다른 공동체적 발전이 요원할 것이다
박= 현재 상황에 대해 깊은 철학적 분석이 인상적이다. 오늘날 세계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이유의 하나는 적과 친구, 선과 악의 경계가 극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던=적이나 친구의 개념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전 세계인의 공통 염원은 갈등, 충돌을 피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는 결국 정치의 영역이다. 결국 인간은 상상력, 생각, 사상에 의존해야 하는데 말씀하신 문화적 소양, 누가 어떤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 요소가 될 것이다. 현 정치는 경제적 목표에만 초점을 맞춘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적 메커니즘을 손봐야 한다. 초국가적 기업이나 각 국가가 책임감으로 세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요구사항을 분명히 해야 한다.
김= 문화적 소양을 추구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특정한 힘을 발휘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런 현실적 이유로 안정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적이 필요하기도 하다. 헤겔에 따르면 정치는 일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영향 받는다. 그만큼 교육자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 19세기 독일에서 교육을 ‘자기수양’으로 표현했는데 유교 사상에서도 자기수양이 인류의 평화를 고양시킨다고 봤다. 교육의 내용이 물적 가치 추구만이 아니라 열정과 이상의 조화를 추구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박= 비교적으로 봤을 때, 동아시아의 경제적 협력은 증진되고 있지만 군사적ㆍ민족주의적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또 중동보다는 안전하지만, 유럽이나 남북미보다는 위협적인 상태다. 이런 아시아 패러독스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김= 과거 한중관계를 보면 조약 등 외교로 맺어진 관계라기보다는 의식(儀式)으로 맺어진 관계에 가깝다. 근대화의 진행으로 부국강병의 개념이 등장하긴 했지만, 동아시아인들은 절대선보다는 삶의 상대성을 중시한다. 아쉬운 것은 체계적인 공동체를 만들 체계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현실적, 이성적 조약ㆍ계약관계를 서양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던= 동아시아가 남북아메리카나 유럽보다도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러시아의 위협 등으로 유럽도 안전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동아시아에는 독특한 갈등 패턴과 상호 구조가 있고 각국의 시급한 사정들이 존재한다. 분명한 공통의 가치를 설정하면 긴장이 완화될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의 각기 다른 책임추궁이 이해는 되지만 이 추궁이 끝끝내 성공하기는 어렵다. 어떤 책임을 물을 것인지 보다 옆 나라에 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도록 자각의 틀을 변화시키자는 얘기다.
박= 동아시아가 문제해결의 한 방법으로 공동 안보기구나 다자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김= 다자관계를 갖기 위해 우선 문화 사회 전반에서부터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 정치와 연관된 평화 논의는 한계를 지닌다. 전략과 이해관계가 얽힌다. 다만 정치는 문제의 해결자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고취된 민족주의가 이를 어렵게 할 수는 있다.
던= 동아시아 국제기구를 위한 정치적 협력을 중국이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중국의 이익이 관계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다른 국가들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해야 한다. 외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제도적 질서와 협상을 바탕으로 한 국제기구가 설립돼야 한다.
김= 세 단계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국가들 사이의 힘의 경쟁 단계, 둘째는 기구와 같은 제도적 장치, 셋째는 문화적 정신적 차원에서의 평화가 중요하다는 공감의 확대다.
던= 중요한 것은 중국 정부가 평화라는 이름 아래 시민의 이득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정부의 행위에 어떤 동기를 부여하느냐에 달려있다. 주변국들이 중국의 정치리더들에게 그들이 선을 행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동기부여를 자꾸 해야 한다.
김= 중국은 아직까지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평화를 유념하고 있다. 따라서 다자간 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러시아 미국 사이에서의 위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천하의 모든 중심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결국 그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립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 지배주의적, 자국가 중심적 인식에서는 한결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민족주의에서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 그렇다면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미래상은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
김= 한번은 한중일 작가들이 모인 회의에서 모임을 동아시아 작가 의회라고 명명하자고 했더니 중국 작가들이 반대했다. 중국은 동아시아 국가라기 보다는 단지 세상의 중심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3자 회담 등 회의에서도 중국은 일대일 계약 이상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던= 동아시아의 화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의 완화다. 이는 과거라는 개념을 수반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문제지만 서로 실익을 취하려면 과거를 딛고 일어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만 계속 얘기하면 서로에게 실이 되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득이 될 수도 없다. 보복, 보상은 정치적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박=예수는 신에 의한 용서보다는 인간들 상호간의 용서가 먼저 임을 누차 강조한다. 가능할까.
김= 연민이 중요한 감정이다. 용서라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한국에서는 심정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금번 회의에서 베르너 페니히 베를린자유대 교수가 “폴란드 주교는 독일인들에게 먼저 ‘우리가 용서하겠다’고 말했다”는 사례를 언급했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박= 심화하는 민족주의적 긴장은 완화가 가능할까.
김= 일단 한 곳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안정시킨 다음에야 외교적으로 논할 수 있다. 너와 나를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학생들에게 너의 뇌와 아인슈타인의 뇌를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어보면, 학생들은 생각보다 무척 많이 망설인다.
던= 더 영리해지고 싶긴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싶지는 않은 것 아니겠나.(웃음)
박= 현재 중국의 위치와 동아시아 평화에 대해 평가한다면. 그들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말하는데, 평화도 그러할까.
김= 조지 부시가 시작한 이라크전쟁은 민주주의가 하나의 도그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민주주의가 비단 정치기구 혹은 정치형태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구체적으로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형태에 대해 이해하고 명시해야 한다. 중국이 스스로 그 형태를 어떻게 명명하냐는 단지 그들의 선호이고 생각이다. 인도의 교통체증을 경험한 BBC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심각한 사태에 대해 사람들이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했지만, 결국 피해 당사자들이 만족하니 사태를 수용하게 됐다. 중국 나름의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던= 현재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모순점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체제의 존속 가능성 역시 매우 열린 물음이다. 결국에는 중국 정치나 체제가 사람들을 얼마나 잘 설득하고 충족시킬 것이냐의 문제다. 잘하는 정책이 늘 도덕적으로도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에는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다. 많은 중국인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고 세상의 기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에선 부정부패가 만연하다. 중국의 구호와 현실은 실제로 상반된 간극을 드러내고 이 간격 차가 무척 크다.
박=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핵심 과제인데.
던= 북한 정권이 핵을 개발할 때는 항상 바깥에서 위협이 존재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위협이 고조됐을 때 핵에 천착한 것이다.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선 북한을 설득해야 하고, 북한 정부에 정권이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미국이 이란과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김= 이란 문제 해결이 힘입어 북미 관계를 해결하면 좋을 것이다. 무조건 북한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손잡고 나가자는 호소를 해야 한다. 물론 위협에는 군사적 반격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박= 민주학, 평화학 학도로서 철학과 현실, 역사와 현대를 넘나드는 현자들의 대화의 향연에 감명받았다. 끝으로 삶의 영구평안과 세계의 영구평화를 위해 기존 철학이나 이론이 충분한가. 아니면 새로운 사상이 필요할까.
던= 새로운 사상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평화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낀다. 지구의 모든 이들이 바보 같고 소모적인 싸움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의 지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얻은 이득은 찰나의 이득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세심한 협력이 시급하다.
김= 자본주의의 발전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선물했지만, 우리는 삶의 기본 요소를 잊고 있었다. 삶이 우리에게 준 정말 아름다운 경외감, 존경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독단적인 의지로서의 자유와는 다른 것이다. 인생에서 교조적 형태가 아닌 초월적 차원을 경험하고 배워가야 한다.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이고 바로 이 신비로부터 도덕적인 법칙들이 나온다. 도덕적 법칙은 바로 우리 가슴에서 나오며, 우리는 그러한 도덕의 법칙에 충실해야 한다.
박= 지금 말씀들의 철학적 성찰과 도덕적 울림이 내면으로부터 다가온다.
김= 인간의 존엄성과 예절에 대한 더 많은 이해와 존중, 고찰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던= 인류가 우리가 맞닥뜨린 집단의 위험을 인식하는 것, 낮은 단계에서부터 함께 협력해서 이를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는 실용적 태도를 배웠으면 한다.
김=옳은 말씀이다. 위험을 자각하고 자각된 위험에 대해 집합적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 종전 70년을 맞아 동서양의 두 현자가 나눈 가장 의미 있는 대담이라는 생각이다.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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