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등 감안 아베 낙마 가능성 낮아
내년 참의원 선거가 운명 가를 듯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야당과 다수 국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집단자위권 법안 처리를 강행하는 상황은 55년전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당시 총리가 초래한 ‘안보투쟁’ 정국과 흡사하다. 1960년 기시 당시 총리는 미일공동방위를 명문화한 ‘신(新)안보조약’ 비준안을 강행 처리해 일본이 냉전에 가담할 빗장을 열어젖혔다. 이에 전국적인 정권타도 안보투쟁이 분출하면서 기시 내각은 두 달여 뒤 총사퇴했다. 반대여론을 정면돌파하고 있는 아베 총리도 ‘독배를 든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1960년 5월19일 기시 총리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미일 안전보장조약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회의장에서 끌어내는데 경찰 500명이 동원됐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악몽에서 벗어난 지 15년에 불과했던 당시 일본인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 ‘기시 퇴진’ ‘전쟁 반대’를 외치는 33만명 시위대가 국회를 둘러싸고 총리공관까지 에워싸는 등 전후 최대의 국민저항이 폭발했다.
결정타는 6월15일 발생한 시위 여학생의 사망사고다. 국회의사당 내부 진입을 시도한 시위대와 경찰간 격렬한 충돌과정에서 참사가 벌어졌고, 한달 뒤인 7월15일 기시 총리는 공과를 사후 평가 받겠다며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고 살해당한다면 바라는 바다”는 어록도 남겼다. 이런 외조부의 신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베가 마침내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군사적 보통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외조부처럼 낙마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이다. 우선 반대시위 규모에서 당시의 10분의 1 수준이다. 최대 규모였던 지난달 30일 전국동시다발 시위에서 주최측 집계 참가자 수는 약 12만명이다. 경찰 측은 약 3만3,000명으로 집계했다. 안보법안의 참의원 특위 처리를 시도한 16일 저녁 ‘총력행동 실행위원회’가 발표한 참가자 수는 오후 8시40분께 3만5,000명 수준이다. 기시 총리 당시인 1960년 6월19일 약 33만명(경시청 집계 13만명)이 집결한 상황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무엇보다 왜소해진 국력에 과거를 떠올리며 우경화된 일본사회 분위기와 이런 정서에 편승한 아베 총리의 개인 인기를 감안하면 55년전 과는 다르다는 분석이 현재로선 많다. 당장의 시험대는 안보법안 강행 처리후 후 내각 지지율이겠지만, 대학만 졸업하면 누구든 취업이 가능하게 바꾼 아베노믹스의 가시적 효과 지속 여부나 내년 참의원 선거 민의가 아베의 운명을 가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