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주요'는 중국 명품 도자기의 비주류라 할 수 있다. 자주요의 거래가는 최상품이 원화로 1억원에서 2억원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저렴하다. 가장 큰 이유는 관요가 이닌 민요이기 때문이다.
자주요는 도자의 대표격인 5대 명요와 달리 민간의 민간을 위한 그릇을 생산한 민요이다. 민요가 경제적인 이득이 약하다는 이유로 현재는 소장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송대 자주요는 송대 민간요의 특징과 백성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역사적 사료이자 송대 북방 민요자기의 전형이다. 조형이나 장식은 물론 실용적이고 미적인 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자주요의 독특한 특성은 백화장 기법과 통일된 조형의 독특한 장식 기술로 지방색 뿐 아니라 민족적인 시대 양식도 나타난다.
오늘날 사용하는 도자기의 '자'라는 한자가 자주요의 '자'라고 할 정도로 자주요는 중국도자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주요의 한계 또는 범위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 설을 놓고 논쟁한다. 먼저 '자주요'는 용천요나 정요처럼 요지의 명칭을 붙이지 않고, 당대말기부터 14세기 말까지 화북의 수많은 가마에서 제작된 다양한 민간자기의 총칭이라는 설이다. 두 번째는 '자주요'를 고대의 자주 지역내의 요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북송시대에 같은 원료·같은 소조방법·같은 화문장식을 쓴 요들의 총칭으로 하북·하남·산서·산동 일대의 요장을 말하며 이중 하나인 하북성 자현의 자주지방에서 명칭을 따서 자주요라 하였다는 것이다.
송대 자주요는 하북 한단시 팽성진진을 중심으로 북방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가마로 중국도자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
자주요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짧다. 한단시 관태진에 위치한 자주요는 1980년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시기 발굴된 자주요의 가장 보편적인 장식기법인 백지흑화 기법은 화장토를 입힌 기물 위에 회화 도안이나 문자 등을 붓을 이용하여 그린 뒤에 시유하여 소성하는 것이다.
송대 자주요 장식기법중 '철화청자'와 자주요 백지철화는 고려청자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송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고려 문종연간 고려청자에 보이는 철화기법은 당시 자주요의 철화기법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문양의 소재에서도 자주요와 고려청자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자주요와 고려청자에 잘 나타난 철화문양은 국당초문·박지문을 표면의 넓은 부분에 표현했다.
첸쩡샤는 '중한고미술협회'이사로 1,000여점의 중국도자기를 두루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C'는 중국도자기(Chinese ceramics)를 뜻한다.
채준 기자 doorian@sporbiz.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