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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車 배기량 전성시대의 종말?

입력
2015.09.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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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기술 발전에 의미를 잃어가는 자동차 배기량

왼쪽부터 BMW 118d, 320d, 520d. 차체와 가격은 차이가 나지만 세 모델 모두 '심장'은 2.0 디젤 엔진입니다. BMW 제공
왼쪽부터 BMW 118d, 320d, 520d. 차체와 가격은 차이가 나지만 세 모델 모두 '심장'은 2.0 디젤 엔진입니다. BMW 제공

“큰 맘 먹고 차 바꿨다. 이점영으로.”

“부럽다. 난 아직도 점육 타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 남성들 사이에 흔하게 오갔던 대화입니다. 이점영(2,000㏄)이나 점육(1,600㏄)은 자동차 엔진 배기량을 뜻합니다. 배기량은 엔진 실린더의 체적이죠. 4기통이면 실린더 4개, 6기통이면 6개를 다 합친 것이 엔진의 배기량이 됩니다. 배기량이 크면 엔진이 크다는 의미여서 힘이 좋지만 연료를 많이 소비합니다.

지금도 배기량은 자동차를 구분하는 잣대입니다. 현행 자동차관리법상 승용차는 배기량에 따라 경형(1,000㏄ 미만)ㆍ소형(1,600㏄ 미만)ㆍ중형(1,600㏄ 이상 2,000 미만)ㆍ대형(2,000㏄ 이상)으로 나뉩니다. 차체 크기 규정도 있지만 대부분 ‘배기량이 크면 비싸고 좋은 차’로 인식합니다. 매년 상ㆍ하반기 지방자치단체에 내는 자동차세도 배기량에 따라 부과됩니다.

수십 년 유지된 배기량의 아성은 수입차가 몰려온 요 몇 년 사이 금이 갔습니다. 같은 배기량의 엔진이 차체 크기와 관계 없이 여러 모델에 고루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디젤 승용차 열풍을 몰고 온 ‘강남 쏘나타’ BMW 520d는 4기통 트윈파워 터보 디젤 엔진을 사용합니다. 배기량은 정확히 1,995㏄죠. 같은 5시리즈 가솔린 모델 528i도 2.0 엔진을 쓰고, 배기량 역시 거의 같습니다.

이보다 차체가 작은 BMW 3시리즈 주력 모델인 320d도 똑같이 4기통 트윈파워 터보 디젤 엔진에 배기량 1,995㏄입니다. 지난 6월 출시된 뉴 1시리즈 디젤 엔진도 마찬가지입니다. BMW 측은 “엔진 고유번호가 같기 때문에 같은 엔진”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자동차로 치면 아반떼 쏘나타 그랜저에 모두 같은 배기량 엔진이 탑재된 셈입니다.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왼쪽)와 E클래스. 디젤 모델인 C220 블루텍과 E220 블루텍도 배기량이 2,143㏄로 같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 제공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왼쪽)와 E클래스. 디젤 모델인 C220 블루텍과 E220 블루텍도 배기량이 2,143㏄로 같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 제공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와 E클래스 디젤 모델도 엔진에 차이가 없습니다. C220 블루텍과 E220 블루텍은 둘 다 직렬 4기통 디젤 엔진에 배기량 2,143㏄입니다. 제원표상 최고출력(170마력)과 최대토크(40.8㎏ㆍm)도 똑같습니다. 차체는 E클래스가 더 크고 가격도 부가가치세를 포함해 5,520만~5,670만원인 C220보다 E220 블루텍이 700만원 이상 비쌉니다.

V40 크로스컨트리(왼쪽)와 V60 크로스 컨트리도 둘다 2.0 디젤 엔진을 탑재했습니다. 볼보자동차 제공
V40 크로스컨트리(왼쪽)와 V60 크로스 컨트리도 둘다 2.0 디젤 엔진을 탑재했습니다. 볼보자동차 제공

볼보자동차가 야심 차게 밀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CC)’에서도 배기량이 의미 없습니다. 크로스 컨트리는 왜건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장점을 합친 신개념 차종인데 올해 초 출시한 가장 작은 크로스 컨트리 V40 CC나 이달 초 내놓은 V60 CC 모두 2.0 디젤 엔진을 얹었습니다. 다음달 나올 예정인 주력 세단 S60에 기반한 3번째 크로스 컨트리 S60 CC도 배기량이 같습니다. 볼보 관계자는 “배기량은 차이 없어도 차체에 맞게 엔진과 변속기를 세팅해 주행 특성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SM3(왼쪽)는 통상 준중형, SM5는 중형 세단으로 구분하지만 다운사이징한 SM5 TCE(오른쪽) 배기량은 SM3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르노삼성자동차 제공
SM3(왼쪽)는 통상 준중형, SM5는 중형 세단으로 구분하지만 다운사이징한 SM5 TCE(오른쪽) 배기량은 SM3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르노삼성자동차 제공

국내 완성차들도 같은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2013년 5월 출시된 르노삼성자동차의 SM5 TCE는 1.6 가솔린 터보 엔진을 적용해 배기량을 1,998㏄에서 1,618㏄로 확 줄였죠. 국산차 중 첫 다운사이징 사례입니다. 이렇게 되니 차체가 훨씬 크지만 1.6 가솔린 엔진을 쓰는 바로 아래모델 SM3의 배기량(1,598㏄)과 별 차이 없습니다.

한국지엠(GM)의 쉐보레 크루즈도 1.4 모델의 경우 한 체급 밑인 아베오와 배기량이 같습니다. 그래도 업계에서는 여전히 크루즈를 소위 준중형, 아베오는 소형으로 구분합니다.

신형 아반떼(왼쪽) 2.0 모델이 연내 출시되면 쏘나타 1.6 터보(오른쪽) 배기량을 앞서게 됩니다. 현대자동차 제공
신형 아반떼(왼쪽) 2.0 모델이 연내 출시되면 쏘나타 1.6 터보(오른쪽) 배기량을 앞서게 됩니다. 현대자동차 제공

현대ㆍ기아자동차 역시 LF쏘나타와 신형 K5에 1.6 터보와 1.7 디젤 라인업을 추가하며 ‘중형차는 2,000㏄’라는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현대차는 최근 출시한 6세대 아반떼에 쏘나타나 K5에 쓰는 2.0 가솔린 엔진도 적용할 예정입니다. 체구가 작은 아반떼의 배기량(1,999㏄)이 ‘형님’인 쏘나타(1.6 터보)를 넘어서는 겁니다.

명확했던 배기량 기준이 모호해진 것은 엔진 기술의 영향입니다. 가솔린 직분사(GDi) 엔진, 터보 엔진 등이 일반화되며 배기량은 작아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하게 됐습니다. 엔진 기술이 발전할수록 배기량이 장악했던 헤게모니는 더욱 약해질 겁니다. 배터리와 모터 용량이 중요한 전기자동차나 수소연료전지차에서는 배기량이란 말 자체가 아예 쓰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동차관리법’을 들춰보니 국내에서 배기량으로 차의 종류를 구분한 것은 1987년부터 입니다. 이때 ‘도로운송차량법’이 전부개정되며 자동차관리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방세법이 자동차세를 배기량 기준으로 ㏄당 세율을 곱해 적용한 것은 1991년부터입니다. 이전에는 엔진 실린더 개수에 따라 4기통 이하는 배기량별로 정액 세금을 부과했고, 4~8기통은 휠베이스(축간 거리)까지 따져 세율을 구분했습니다. 지금보다 복잡했죠.

배기량으로 자동차세를 산정하는 방식이 요즘 논란거리입니다. 배기량은 작아도 가격이 비싼 수입차 세금이 국산차보다 적은 것은 불합리하다며 과표기준을 가격으로 바꾸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법이 시대상을 담아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견이 많지만 한편에서는 국산차 세금 부담까지 늘어날 것이란 불만이 제기됩니다. 현재 차 가격에 따라 내는 취ㆍ등록세에 이미 가격 차이가 반영돼 있다는 반론도 있고요.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배기량이 차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겁니다.

김창훈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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