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후배를 만났다. 헤어질 무렵, 막 돌아서려던 후배가 대뜸 가방을 뒤졌다. 꺼내든 건 사과였다. “나한테 사과할 거 있어?” 썰렁한 농담 끝 마디를 자르며 후배가 말했다. “왠지 선배 혼자서 이런 거 잘 안 챙겨 먹을 것 같아서 갖고 왔어. 이건 그냥 책상에 올려두고 보기만 해. 그러고 선배가 사서 먹어. 눈에 안 보이면 잘 생각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러곤 표표히 돌아서 갔다. 한동안 사과를 든 채 후배 뒷모습만 바라봤다. 마음 한끝이 찡해졌다. 사과 생긴 모양이 하트와 닮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제철답게 새빨갰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사과를 한 봉지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후배가 준 건 책장 한쪽에 그냥 뒀다. 하루에 두 개씩 벌써 네 개나 껍질째 먹었다. 책장에 놓인 사과가 그때마다 웃고 있는 듯했다. 세잔 같은 화가가 왜 사과를 줄곧 그려댔는지 알 것 같았다. 바라보는 심사에 따라 모양도 색도 달라 보였다. 이편에서 시선을 두지 않더라도 사과는 계속 날 바라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집에 뽀얗게 세수한 우렁각시라도 숨어있는 것 같았다. 사과가 입을 열어 말을 걸고 아침마다 노래라도 불러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곰곰 살펴보니 방안에서 유일한 천연 빨강이다. 그대로 두면 곧 상할 테지만, 누렇게 졸아든 모습마저 피가 도는 누군가의 순연한 입김일 거라 여겨 그냥 두기로 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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