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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혼인의 파탄

입력
2015.09.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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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매끈하게 대답하기란 어렵다. 남들 다 하듯 연애를 하다 보니 가까워지고, 때가 됐다 싶어 결혼을 하고, 애들을 낳아 키웠다. ‘결혼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라는 영화나 소설 속의 심경(心境)도, 애가 생겨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오랜 연애로 쌓은 정분이 따스했고, 굳이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함께 살면서 부부싸움도 하고 안방에서 쫓겨난 적도 있지만, 며칠이면 다시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결혼과 부부는 원래 그런 것쯤으로 여겼다.

▦ 그러나 서울 변두리로 이사와 지낸 지난 2년 여 사이 그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특별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이를 이어가는 평탄한 결혼생활이 의외로 드물었다. 혼인의 위기나 파탄(破綻)이 더 이상 재벌 2ㆍ3세나 연예인의 일이 아니었다. 변두리 서민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 안 그래도 힘든 일상을 흔들고 있었다. 경제적 궁핍 때문만도 아니고, 외도나 폭력 등 남편 쪽 잘못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혼 사유는 실로 다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껍데기만 남은 혼인 파탄의 실상이었다.

▦ A씨는 부인의 외도에 시달리다가 B씨와의 내연관계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애들이 결혼할 때까지는 이혼하지 않을 생각이다. C씨는 처음부터 남편이 싫었고 수년 전부터 D씨와의 내연관계를 이어 왔다. 남편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이혼 요구에는 응하지 않아 부부는 밤마다 같은 집 다른 방에서 잔다. 이런 이야기를 본인이 스스럼없이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하니, 마치 딴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한 듯했다. 잠시 비난의 마음이 일었다가 이내 당사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변하곤 했다.

▦ ‘혼인은 일생의 공동생활을 목적으로 부부의 실체를 이루는 신분상 계약으로서 그 본질은 애정과 신뢰에 바탕을 둔 인격적 결합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5일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청구권을 부인하면서 밝힌 ‘판결 이유’의 첫 문장이다. 부부 모두 ‘애정과 신뢰’의 마음을 눈곱만큼이라도 남겨야 하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인격적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런 스스로의 심리적 강제와 부단한 윤리적 결단 없이 혼인 파탄의 그림자를 멀리 밀치기는 어렵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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