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 여학생들이 예쁘다는 소문에 혹한 게 발단이었다. 혹시 수업이라도 같이 들으면 뭔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덜컥 수강신청을 한 게 두 번째 실수였다. 수강신청 변경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개강하고 나니 빼도 박도 못하고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겠지만 국문과 학생들도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기를 쓴다는 그 과목을 겁도 없이 들었다. 이름 하여 ‘고급한문강독’이었다. 타과에서 온 학생은 나 혼자이니 대화할 상대도 없었고 그저 꾸역꾸역 진도를 따라갈 뿐이었다.
수업 진행은 무지막지했다. 3시간 연강이 안 되던 때라 화요일 오전에 1시간 수업을 한 후 목요일 오후에 두 시간 수업을 했다. 화요일 한 시간 동안 중국의 명문을 죽 한번 읽고 설명하면 끝이었고, 목요일에는 화요일 수업내용을 노트에 볼펜이나 만년필로 100번, 모필로 한자전용 노트에 30번, 화선지 큰 종이 한 장에 써온 것을 검사 받았다. 노트 검사가 끝나면 써온 내용을 외워 쓰는 시험을 치러야 그 주 수업이 끝났는데, 못 외우면 그 다음 주에 재시험을 봐야 했다. 요즘 대학 수업을 이런 식으로 하면 당장 폐강되겠지만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4학년 1학기 내내 다른 과목은 무얼 들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국문과 여학생들의 미모(?) 따위는 눈에 들어올 겨를도 없었다. 한 주 한 주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고 그저 쓰고 또 쓰며 무모한 선택을 한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참으로 기묘한 일이 생겼다. 괴로움을 즐기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 주 한 주가 지나면서 굴원의 ‘어부사’, 제갈량의 ‘전출사표, 후출사표’, 왕희지의 ‘난정기’,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 두보와 백거이의 시, 한유의 ‘사설’, 소동파의 ‘전적벽부, 후적벽부’, 주돈이의 ‘애련설’, 구양수의 ‘추성부’ 등을 줄줄 외는 내가 대견스러웠고 또 그 글의 멋과 맛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과목만큼은 잘 끝내야겠다는 나름의 다짐까지 하며 열심히 쓰고 외우느라 분주했다. 젊어서인지 긴 문장도 여러 번 쓰면 어렵지 않게 술술 외워졌다. 얼마 전 중국작가들과의 술자리에서 ‘적벽부’와 ‘출사표’를 볼펜으로나마 줄줄 써대며 ‘가오’ 잡았던 것도 그때 머리 깊숙이 새겨진 덕분이다.
중국 문학의 평가에 관한 소박한 의문이 있었지만 수업 때 질문하지 못했다. 소심한 탓이 크지만, 조금 더 공부하면 알 것 같았고 세월이 가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인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젊을 적에는 왜 이백보다 두보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젊은 시절에는 보통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호쾌한 시세계로 ‘시의 신선(詩仙)’, ‘벌을 받아 인간세계로 쫓겨 내려온 신선(謫仙)’이라 불리는 이백보다 쓸쓸하고 답답한 소리만 하는 두보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보의 글은 왜 그리 어두운지 이백에 비하면 궁상 그 자체로 여겨질 정도였다. 두보의 일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던 탓에 그의 시세계가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이 많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젠 알겠다. 고난과 역경이 어찌 두보뿐이랴! 인간사 자체가 후회의 연속이고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남루하며 밝은 일보다 어두운 일이 훨씬 많음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천재형인 이백은 답답한 인간사를 넘어선 초월적 세계를 제시하려 했고 노력형인 두보는 인생 자체의 의미와 본질에 다가서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젊은 머리가 외우는 공부에는 좋지만 인생의 전반을 살피고 조망하는 데는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나이 먹는 즐거움이 하나 더 늘었다. 가을은 두보의 시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두보시선’을 꺼내 놓아야겠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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