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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화폐통합 앞서 獨과 맹주 다투던 英 치욕… 1992년 '검은 수요일'

입력
2015.09.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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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검은 수요일의 영국 금융시장 풍경. AP뉴스
1992년 검은 수요일의 영국 금융시장 풍경. AP뉴스

1992년 9월 16일은 영국 파운드화가 최악의 치욕을 겪은 날이다. 이날 영국 정부는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를 비롯한 국제 헤지펀드의 파운드화 투매 공세에 백기를 들었다. 이른바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이다.

당시 유럽은 정치 통합에 앞선 경제통합과 단일경제의 토대가 될 화폐통합의 터 닦기로 유럽환율매커니즘(ERM)이란 걸 가동 중이었다. ERM은 개별 국가의 통화가치 안정을 위해 환율 변동폭을 일정 범위 내에서 제한하는 시스템이었다. 예컨대 한 국가의 사정으로 환율이 허용 폭을 넘어 급락하거나 급등할 조짐이 보이면 해당국 중앙은행이 시장에 개입 돈을 풀거나 거둬들여야 했다. 영국은 90년 10월 ERM에 가입했다.

진앙지는 통일 독일이었다. 90년 통일한 독일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던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마르크화와 1대1 맞교환하고 막대한 투자로 돈을 풀었고, 독일중앙은행 분데스방크는 인플레를 막기 위해 초고금리 정책으로 풀린 돈을 회수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통독 후 2년간 분데스방크는 무려 10차례 금리를 인상했다. 상대적으로 경제여건이 나았던 독일은 그렇게 물가도 잡으면서 경기를 지탱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주변 유럽 국가들이었다.

금리 즉 돈 값이 오르면 자본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나머지 국가들로선 자국 화폐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다시 말해 빠져나가는 외국자본을 붙들기 위해서 덩달아 금리를 올려야 했다. 그게 ERM 의무규정이기도 했다. 금리가 오르면 환율은 대개 떨어지기 때문이다.

침체기 금리 인상은 유럽 경제에 치명상을 입혔고, 92년 유럽은 한계상황에 봉착했다. 경기는 급랭했고 실업률은 두 자릿수를 넘어섰다. 급기야 9월 8일 핀란드가 마르크화와의 환율 연동제를 폐지했고, 스웨덴은 단기 금리를 500%나 인상했다. 방어 여력을 상실한 이탈리아와 스페인 화폐는 폭락세를 이어갔다.

유럽 맹주의 자존심을 걸고 독일과 경쟁하던 영국은 ERM 내에서 저 독일발 쓰나미를 이겨낼 수 있다고 호언했다. 존 메이저 당시 총리는 “파운드화 평가 절하는 영국의 미래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까지 했다. 그는 중앙은행의 금고를 너무 믿었고, 투기자본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헤지펀드의 파운드화 투매와 영란은행의 방어매수는 9월 15일 본격화했다. 하지만 그 공방은 싱겁게도 단 하루 만에 끝났다. 영국은 16일 ERM 탈퇴를 선언했다. 훗날 확인된 바, 공격 자금은 퀀텀펀드의 100억 달러를 비롯, 1,100억 달러에 달했다. 그 해 소로스 펀드의 운용 수익률은 68.6%였다.

영국이 아직 유로화 서클에 가담하지 않는 데는 검은 수요일의 참담한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1990년대 유럽통합의 애물이던 독일은 2015년 재정통합 없는 화폐통합의 희생양 그리스를 애물이라 욱대기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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