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사실에 충격 받아 발굴 시작
봉환길엔 매일 희생자 추모식 거행
"일본인 모두 사죄 보상 책임 있어"

한 일본인의 40년에 걸친 노력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왔다가 희생된 조선인 유골 발굴작업이 차츰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홋카이도에 있는 절 이치조지(一乘寺)의 주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70)씨가 주인공이다. 그는 조선인 유골들을 한국으로 봉환하는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의 일본 측 단체인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대표로 봉사하고 있다. 지난 14일 일제강점기 홋카이도(北海道)에 끌려가 희생된 조선인 유골 115위(位)를 혼슈(本州)로 옮기는 행사도 그의 역할이 컸다. 유골은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18일 부산에 도착하면서 강제로 끌려간 지 70여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된다.
교토(京都) 류코쿠(龍谷)대를 졸업한 뒤 1973년 홋카이도로 돌아온 도노히라씨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홋카이도 근대화 과정과 제국주의 일본 시기 전반에 만연된 ‘강제노동’을 알게 됐다. 그는 15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너무나 늦었지만 이 유골을 봉환해 유족의 슬픔이 만분의 일이라도 덜어진다면 좋겠다”면서 “관심이 많았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던 차에 지역 민중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자신이 강제노동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역사에 기재되지 않은 강제노동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이후 강제노동 관련 사실들을 밝히는 일을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다짐했다.
1976년 홋카이도 중북부 내륙 슈마리나이(朱鞠內) 우류(雨龍)댐 인근에 있는 절 코켄지에서 조선인 위패를 발견하고 유골을 수습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이 생활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인들이 묻혀 있다는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고 지하에 묻힌 유골들을 역사의 양지로 꺼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실제로 결과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발굴한 유골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1989년 전환점이 찾아왔다. 평화디딤돌 대표 정병호(60·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를 만나 억울한 죽음을 밝히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정 교수는 당시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하며 홋카이도에 현지조사를 온 상태였다.

그는 “연구를 마치고 돌아간 정 교수와 끊임없이 연락하고 만나며 가까워지면서 사업이 차곡차곡 진행됐다”며 “결국 정 교수와 한일 양국의 청년들과 함께 1997년부터 체계적으로 유골을 발굴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그간의 활동이 결실을 맺은 게 이번 유골 115위 봉환이다. 도노히라씨가 이 일에 첫 단추를 끼운 지 39년, 두 사람이 만난 지 26년 만이라고 한다. 도노히라씨는 이 과정에서 기꺼이 희생도 감내했다. 그는 1995년 해체 위기에 놓였던 절 코켄지를 사재를 털어 인수해 역사 자료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왜 굳이 그런 일을 하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받아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약을 달고 살다시피 한다. 그럼에도 홋카이도에서 서울까지 열흘 동안 3,000㎞를 달리는 유골 봉환길에 참여해 매일 각지에서 열리는 추모식에서 활약하고 있다. 모두 역사의 실상을 밝히는 일로 의미를 두고 있다.
지난 14일 도쿄 주오(中央)구의 절 쓰키지 혼간지(築地 本願寺)에서 열린 추모식에서도 그는 조선인 희생자의 사연을 일본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유골을 발굴하고 사죄 보상할 책임은 기업이나 정부뿐 아니라 일본 국적을 가진 우리 일본인 모두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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