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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새 옷을 입다

입력
2015.09.1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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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라픽스 출판 프로젝트

작가·타이포트래퍼 짝 지어

시와 디자인 경계 무너뜨려

박상순 시인의 시에서 입체성과 운동성을 느낀 유지원 디자이너는 시집을 종이접기 형태로 디자인했다. 원 안은 시집을 오려 접은 모습. 안그라픽스 제공
박상순 시인의 시에서 입체성과 운동성을 느낀 유지원 디자이너는 시집을 종이접기 형태로 디자인했다. 원 안은 시집을 오려 접은 모습. 안그라픽스 제공

시인 김경주씨는 “나는 시를 언어 예술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 시는 무슨 예술인가.

이상(李箱) 같은 몇몇 시인들 덕에 우리는 글자가 선과 면의 틀을 이탈할 때 의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희미하나마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정답을 색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제멋대로 흩날리는 글자들을 좀처럼 참아내지 못한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시들은 30절판 책 안에 얌전히 담겨 의미 해석을 기다린다.

안그라픽스 출판사의 ‘16시’ 프로젝트는 시를 포함한 제반 텍스트가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얽힌 제도와 관습에 반기를 든다. 기획자는 작가와 타이포그래퍼를 짝 지어 서로의 역할에 경계를 두지 않고 16쪽짜리 책 한 권을 만들게 했다. 지난해 말 유희경과 신동혁, 황인찬과 김병조, 이로와 강문식의 책이 첫 출간된 데 이어 올 여름 김경주와 김바바, 박상순과 유지원, 한유주와 김형진, 김종소리와 오디너리 피플(앞이 작가, 뒤가 타이포그래퍼)의 작업물이 잇따라 나왔다. 올해 안에 서너 쌍의 책이 추가로 발간될 예정이다.

작가와 타이포그래퍼의 경계 붕괴는 어떤 결과물로 이어졌을까. 앞서 쓴 김경주 시인의 말은 화목한 작업을 예고하지만, 박상순 시인의 말은 전쟁의 서막과도 같다. “시인이 땅을 파는 사람이라면, 타이포그래퍼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에요. 서로 하는 일이 달라요. 타이포그래퍼가 억지로 시를 조정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나 결과물을 보면 동방예의지국답게 서로를 배려하며 작업한 것을 알 수 있다. 워크룸프레스의 대표이자 그래픽디자이너 김형진씨는 소설가 한유주씨를 위해 워드프로세서 스타일 가이드를 만들었다. 한씨는 아래아한글의 모든 기본값(줄 간격, 용지방향 등)에 무감하지만 기본 서체인 함초롱바탕체를 유독 못 견뎌 했고, 김 대표는 18개의 워드프로세서 스타일을 만들어 작가에게 건넸다. 그가 직접 조판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준 이유는 조판의 불필요한 중복을 ‘고발’하기 위해서다. “작가가 손으로 글을 썼던 시절에 조판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워드프로세서가 발달된 요즘엔 작가들이 쓴 파일을 그대로 출력해도 책이 돼요. 작가의 1차 조판을 디자이너가 굳이 2차로 조판하는 것,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씨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서른 두 장의 집시카드’란 짧은 소설을 썼다.

박상순 시인은 디자이너 유지원씨에게 자신의 시를 제공하며 디자인 전권을 내맡겼다. 글자를 뒤집든, 흔들든, 심지어 없애도 괜찮으니 단 하나 “책을 만드는 동안 내 시를 생각하라”는 요구만 남겼다. 유씨는 박상순의 시에서 느껴지는 입체성과 운동성에 의거해 시집을 종이접기 책으로 디자인했다. 선을 따라 오려 접으면 시는 별 모양, 꽃 모양, 바람개비 모양으로 바뀐다. 박 시인은 “지금 시집의 판형은 과거 운율에 맞춰 20~30행으로 쓰여진 시엔 적절하지만, 분량이 A4 한 장을 넘어가고 내용도 파격적인 요즘 시와는 자주 충돌한다”며 “모든 시에 새로운 형식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새로운 시에는 새 옷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6시’는 글자가 책에 담기는 모든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텍스트와 타이포그래피의 무작위 혼성을 응원한다. 기획자 민구홍 팀장은 “박상순 시인이 ‘16시’로 등단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특히 힘이 된다”며 “등단하지 않은 사람들 중 기성 작가보다 탁월하게 글을 쓰는 사람,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솜씨 좋은 타이포그래퍼들이 ‘16시’를 통해 활발하게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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