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유행하는 ‘층간소음 보복상품’이라는 게 있다. 개당 15만원가량 하는 블루투스 우퍼 스피커인데, 집 천장에 매달아 놓으면 소리의 직진성으로 인해 지축을 뒤흔들 정도의 중저음 진동이 고스란히 윗집으로 향하게 된다. ‘세계 최초 차음 패드 내장’으로 자기집에는 약간 새나오는 수준으로만 소리가 들린다고. 제조사 홈페이지에는 ‘윗집이 미쳐 돌아가는 음악’이라는 카피와 함께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곡 ‘미궁’의 유튜브 동영상이 추천, 링크돼 있다.(아, ‘지못미’ 황병기!) 과연 이런 물건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손님인 양 슬쩍 전화를 걸어봤더니 “없어서 못 판다”는 대답과 함께 “한꺼번에 열 개를 구입해 집 곳곳에 설치해 놓은 고객도 있다”는 홍보가 이어졌다. 오로지 보복의 목적으로 이런 거금을 쓸 수 있는 어떤 결의가 나는 놀랍다.
지난 7, 8월은 경찰의 ‘보복운전 집중 단속 기간’이었다. 출근길 지나치는 남대문경찰서 전광판에 쓰인 보복운전이라는 네 글자를 보는데, 돈오의 순간이 왔다. 만삭의 몸으로 도로 위의 추격전을 당하면서도 그저 운이 나빴다고 애써 외면해왔던 그것, 그것이 마침내 보복운전이라는 명확한 범죄의 형태로, 형사적 처벌 대상으로까지 승격돼 있었다. 경찰은 앞서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의 ‘흉기 등 협박죄’ 등을 적용, 보복운전을 엄정 처벌하겠다고 밝혔으나, 도로 위의 분노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집중단속을 실시했다. 심금을 울렸던 슬픔의 안내문구: “경찰은 피해자가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도록 가명조서 등을 활용하고 신고자의 인적사항을 비밀로 하는 등 신고자의 신변보호를 철저히 할 예정이다.” 단지 진로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갓길로 밀어붙이는 보복운전자가 출몰하고, 이를 신고하기 위해서는 가명조서를 써야 한다면, 이곳은 ‘헬조선’이 맞다.
크고 작은 보복이 난무하는 보복사회다. 의도치 않은 실수에 예기치 않은 보복이 들이닥쳐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둘러보면 도처에 칼날 돋은 사람들이다. ‘네가 감히 나에게…’의 분한 마음이 지배적 센티멘트이며, ‘나 만만한 사람 아니다’가 필사의 메시지다. 물론 층간소음은 괴롭고, 진로방해는 짜증난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의 가장 고통스럽고 억울한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내 집과 차에 가해지는 피해는 일말도 용납치 않겠다는 전투 태세를 해제하고 보면, 층간소음이란 케이크와 과일바구니 한번씩 오가면 상호 양해 가능한 생활소음일 뿐이며, 차선 변경으로 인한 끼어들기는 ‘그렇게 급하면 어제 출발하지 그랬슈’ 한 마디로 넘어갈 사안이다. 보복사회의 적들은, 겪는 사람이 떠올리는 고의와 악의로 점철된 시나리오와는 딴판으로, 그저 무심코 실수를 저지른 이들일 뿐이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통쾌한 복수극에 천만 관객이 잇따라 호응했다. 극악무도한 친일파와 막장 재벌3세를 마침내 처단하는 소망충족의 서사에 관객들이 열광했다. 정의란 한낱 신화의 영역에 박제된 것이어서 우리는 감히 복수하지 못하고 고작 보복하는 것일까. 민간에 횡행하는 보복범죄의 대부분이 층간소음 갈등과 보복운전인 것은 내 집과 자동차가 억압된 분노를 분출하기에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공간이어서일 것이다. 내 집과 내 차에서만큼은 갑이고 싶다는 우리들 좌절된 욕망이 범죄의 문턱을 넘나드는 분노의 원천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란 사실 참지 않아도 되는 분노이기 십상이라 우리는 대개 사소한 일에만 분개한다. “왜 왕궁의 음탕 대신 기름덩어리 갈비탕에만 분개하는가” 한탄했던 시인 김수영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고도 썼다. 그는 그 전통이 이토록 유구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곧 추석이다. 환대가 강물처럼 흐르고, 배려가 들꽃처럼 만발하는 나라이면 좋으련만, 고향 가는 길 도처에 잠복해 있을 로드 레이지와 층간소음이 부른 살인 같은 무서운 뉴스부터 떠오른다. 경찰이 두 차례 출동한 바 있는 친정에서 어떻게 두 아이의 다리를 묶어놓고 있을지 그것이 고민인, 민족 고유의 대명절 추석이다.
박선영 문화부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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