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사안 반복 제기ㆍ결과 불복 등
악성 민원인 분류 기준 자의적
지난해부터 시행… 62명 관리
"국민청구권 억압 행위" 비판 일어
블랙리스트 자체 인권침해 요소도
경찰이 같은 사안에 대해 반복해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을 악성 민원인으로 분류해 별도 관리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예상된다. 업무처리의 효율성을 이유로 ‘민원인 블랙리스트’를 만든 셈인데, 국민청구권을 억압하는 행위란 비판이 제기된다. 현재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시민은 62명으로 파악됐다.
13일 경찰과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은 강신명 경찰청장 재직 시절인 지난해 4월부터 ‘악성민원인 근절 대책’을 시행해 오고 있다. 일선 경찰서를 통해 제기된 민원 내용을 취합해 악성민원인 리스트를 작성하고, 리스트에 포함된 사람이 민원을 재차 제기하면 특별한 조사 없이 사건을 ‘불문처리’하는 식이다. 또 허위사실에 기초한 민원에는 무고 및 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하는 등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문제는 경찰의 악성민원인 선정 기준이 지나치게 모호해 부당한 법 집행이나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서울청이 국회에 제출한 ‘상습ㆍ악성 민원사건 대응 강화 방안’ 문건을 보면 ‘악성 민원인’ 분류의 기준은 3가지다. ▦동일 사안으로 특정ㆍ다수기관에 반복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 ▦동일 사안에 대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기준을 고집해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 ▦1회 민원제기라도 명백히 허위인 사실에 기초해 민원을 제기한 경우이다. 이런 분류에 근거해 현재 경찰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원은 총 62명이다.
하지만 이 같은 악성 민원인 기준은 자의적이어서, 오히려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 기준 대로라면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해 재조사를 요구하거나 민원처리 결과에 정당한 이의를 제기해도 블랙리스트에 등재될 수 있다. 경찰이 ‘주관적 불복’이라고 판단하면 선량한 시민도 악성민원인이 되는 것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경찰은 공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민원을 내기가 쉽지 않다”며 “그럼에도 경찰의 일방적 통보에 승복하지 못한다고 해서 민원 자체를 통제하는 것은 업무 효율성만 높이려는 행정 편의주의”라고 비판했다.
다른 공공기관의 민원 대응 기준과 비교해도 경찰의 분류는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다산콜센터 직원들의 인권 침해문제가 불거지자 악성민원인에 강력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는 ‘욕설과 협박을 3회 이상한 민원인’ ‘성희롱 발언을 한 민원인’ 등 악성민원의 성격과 위법한 행동 사례를 상세히 명시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경찰관을 상대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진정을 내고, 또 전화 욕설하는 민원인이 많아 법적 대응과 처벌 방안을 마련한 것일 뿐, 민원을 사전 차단하려는 목적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악성민원인의 떼쓰기 행위는 근절해야 할 부분이지만, 불분명한 기준을 내세워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인권 침해의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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