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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돌들의 원망 소리

입력
2015.09.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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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이란 말이 퍼지고 있다. 그것으론 약하다고 하여 ‘조선’을 ‘조센’으로 대체, ‘헬조센’이라고도 한다. 폄하의 뜻이 한층 더해진 표현이다. ‘사오정’, ‘n포세대’ 같이, 특정 세대의 암담한 현실과 미래를 자조하던 신조어가 속출하더니, 이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이 출현한 셈이다.

춘추시대 역사를 다룬 ‘춘추좌전’이란 책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기원전 524년, 진(晉)나라 위유라는 곳에서 돌들이 말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군주가 사광에게 어찌하여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물었다. 그는 지혜롭다고 이름난 자였다. 그런데 답변하는 그의 말투가 자못 ‘쿨’ 했다. 백성들이 잘못 들었던지 아니면 돌에 귀신이 붙어서 그리 됐을 거라고 아뢰었다. 그러고는 농번기임에도 백성을 동원하여 공사를 벌이면,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러 결국 말하지 못하는 것들조차 원망하게 된다며 심드렁히 아뢰었다. 당시 진나라 군주는 새로운 궁전을 호화롭게 짓고 있었다. 사광은 돌들이 말을 했다는 소문에 기대어 잘못을 범하고도 고칠 줄 모르는 군주의 탐욕을 풍자했던 것이다.

물론 ‘옛날 사람들답게 돌도 말할 수 있다고 여겼구나’ 하며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근대인의 오만에 불과하다. 사광의 언급에 분명하게 나와 있듯이 당시 사람들도, 돌은 ‘말하지 못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군주 또한 이 빤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근심스러운 듯 사광에게 그 연유를 물었고, 그는 군주의 탐욕을 경계하는 말로 답변을 갈무리했다. 이 기사가 그저 황당무계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하여 유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인 ‘춘추좌전’에 떡하니 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기사는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 당시의 생산력을 감안할 때, 농번기에 백성이 공사에 동원되어 농사를 못 짓게 되면, 모진 겨울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얼추 그러하듯이, 백성의 이런 고충에 지배층은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백성이 군주에 맞설 힘을 지녔다고 자각했던 시절도 아니었다.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원망은 갈수록 커져갔고, 백성들은 그 엄혹한 시련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간절히 원했으리라. 그러자 ‘우주’가 나섰다. 대통령의 어린이날 덕담처럼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 주었다. 그 결과 돌들이 원망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극에 달한 백성의 원망은 사광의 입을 통해 드디어 군주에게 전해졌다. 온 우주가 백성의 간절한 염원에 감응했음이니 짐짓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유의할 바가 하나 있다. 온 우주가 도와줬음에도 군주가 백성의 염원을 외면하면, 백성도 그 군주의 멸망을 염원케 된다는 점이다. ‘돌들의 원망 사건’이 발생하기 1,000여년 전쯤, 중원은 하나라 걸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발군의 폭군답게 온 천지를 흑암에 물들였다. 거듭된 폭정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급기야 이렇게 울부짖었다. “이 태양은 언제 없어진단 말인가(是日曷喪).” 태양은 군주의 상징이었으니 곧 군주의 멸망을 염원했던 것이다. 그러자 “전 우주가 다 같이” 발 벗고 나서 탕왕이란 성군을 보냈고, 그는 걸왕을 내쫓고 만백성을 도탄에서 건져냈다. 정말 간절히 원했더니 꿈이 이뤄졌던 것이다.

신문도, 방송도 없던 시절조차 여론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물욕이 아닌 인문에 터 잡은 국가에선 민간의 여망이 정치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는 으레 이러하기 마련인데, 지금 여기에선 그런 국가가 ‘헬’ 곧 지옥이라 불리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옥엔 태양이 없으니, 온 우주가 다 같이 도와줘도 소용없는 지경에 접어들었다는 징표일까? 이래저래 예사롭지 않은 나날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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