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중복 혜택 축소 명분으로 부처·지자체 정책 잇단 통·폐합
절감액 복지분야 재투자한다지만 가시적 성과나 구체적 계획 없어
인천에서 5년 째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는 박진희(29ㆍ가명)씨는 요즘 월급이 줄어들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루 10시간 이상 아이들과 씨름하며 박씨가 손에 쥐는 돈은 인천시의 ‘보육교사처우개선비’ 보조(17만원)를 포함해 한 달 167만원. 하지만 최근 보건복지부가 인천시의 보조금지급이 중앙정부 사업과 중복된다며 통폐합을 권하고 있다. 박씨는 “쥐꼬리만한 보조금조차 깎겠다는 정부의 태도가 야박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서울형 기초보장제도’도 구조조정의 기로에 섰다. 이 제도는 중위소득 40% 이하의 빈곤층이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수급자가 되지 못한 이들을 지원하는 제도. 복지부가 “중복되지 않으니 시행하라”고 해 2013년 시작한 사업이지만 지난달 폐지 권고를 받았다. 서울시 관계자는“다른 지역에 비해 주거비와 물가가 비싼 서울시의 특성을 감안해 시행하게 된 사업”이라며 “사회복지 사각지대 해소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정비안을 제출하라고 하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4월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가정책조정회의가 결정한‘복지재정 효율화 추진방안’의 후속조치들. 복지부는 이 방안에 따라 지난달 중앙정부 사업과 중복된다고 판단한 지자체 복지사업 1,496개를 통폐합할 것을 권고했다.
중복되거나 방만하게 운영되는 복지제도의 정비와 재정 효율화는 필요하지만, 여전히 넓은 복지사각지대 해소방안은 빠진 채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있다.
범정부적 복지재정 효율화 밀어붙이기
‘복지 재정 3조원 절감’을 명분으로 추진되는 복지재정 효율화 정책은 범 정부적으로, 일사천리로 이뤄지고 있다. 정부는 복지재정효율화를 위한 조직개편을 끝냈다. 지난 7월 총리실 산하 사회보장위원회(사보위) 조직을 바꾼 것. 사회보험ㆍ사회서비스ㆍ공공부조 전문위원회 등 사회보장분야별 안건을 검토하던 기존의 산하위원회들이 재정ㆍ통계ㆍ제도조정ㆍ평가 전문위원회 등 중복을 줄이고 재정효율화를 중점적으로 검토하는 위원회로 바뀌었다. 또한 복지부 복지행정지원국내 2개 부서에 불과했던 사보위 사무국은 3개과로 확대됐고 복지부 출신이 아닌 기재부 출신 관료가 책임자로 왔다. 몸집 줄이기 강조를 강조해 온 정부의 행태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중앙정부의 필수 복지사업들도 정리대상이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는 ‘의료급여’제도는 재정누수가능성이 높다며 혜택축소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2010년 167만 명이었던 의료급여 대상자는 최근 5년간 이미 23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지자체의 각종 사회보험료 지원사업 폐지도 권고돼 지출 중 의료비 비중이 가장 큰 저소득층의 부담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됐다. 건강보험료 월 1만원을 내지 못하는 생계형 체납자는 12만 명이 넘는다.
중복사업축소와 각종 부정수급적발은 정부가 재정효율화를 달성한다며 사용하는 전가의 보도. 지난 4월 이후 복지부가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중복복지를 찾아내겠다며 지자체 복지사업 전수조사를 실시한 데 이어 고용노동부는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부정수급을 집중조사했다. 건강보험공단은 경찰과 합동으로 이른바‘사무장병원’의 부정수급을 특별점검했다. 하지만 각종 부정수급액은 이를 적발하기 위해 투입하는 노력에 비하면‘새발의 피’수준이다. 고용부에 따르면 지난해 적발한 실업급여 부정수급액은 130억원으로 전체 지급액 4조1,520억원의 0.3% 수준이었다.
정부는 중복사업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지자체 사업을 정비하고 있지만, 600만 명 이상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밀한 사업평가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보위 전문위원인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다문화ㆍ농어민 지원사업 등은 중복사업이 많아 정비가 필요한 건 맞다”면서도 “조정은 하되, 제대로 하고 있는 사업들은 훼손하지 않도록 신중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지사각지대 해소와 병행… 균형 맞춰야
지난 4월 국가정책조정위원회는 ‘복지재정 효율화 추진방안’을 발표하면서 “올해 절감하는 재원 전액을 복지분야 재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이 방안을 통해 절약한 3조원을 어떤 식으로 복지에 재투자할지 아직까지 밝히지 않고 있다.
정부가 복지예산이 급증한다며 복지재정 효율화를 명분으로 사실상 복지축소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우리 복지수준은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는 것이 실상이다. 2014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지출은 1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OECD 평균(21.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8일 발표된 내년 정부 예산안에서 노동ㆍ보건ㆍ복지를 포함한 예산은 122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6.2%(7조2,000억원) 늘었다. 하지만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군인ㆍ사학연금 등 4대 공적연금의 자연증가분이 이중 42.3%인 3조461억원으로 복지분야 재투자를 위한 당국의 정책의지는 엿보이지 않는다. 내년 복지예산 증가율은 정부가 분야별 예산을 추계한 2005년 이후, 2013년(5.2%) 다음으로 낮은 수준이다.
긴급한 과제로 요구되고 있는 복지 사각지대 해소 관련예산이 제자리걸음인 점이 특히 문제다. 예컨대 지난해‘송파 세 모녀사건’ 이후 가족 중 주로 돈을 버는 구성원이 실직하거나 부상할 때 받을 수 있는 긴급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관련 예산(1,013억원)은 동결됐다.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많은 빈곤층이 수급자가에서 탈락, 올해 기초생활보장제의 개별급여화를 계기로 이 기준을 폐지하거나 완화하라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정부는 재정부담을 이유로 올해 440억원만 투입해 교육급여의 부양의무자기준만 폐지했다.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실제 현장에서 중복 등 도덕적 해이 문제가 10%라면, 복지 혜택의 누락 문제가 90%”라며 “복지재정 효율화는 필요하지만, 복지정책의 1순위를 중복 방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상은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중복되고 방만하게 사용되는 복지재정에 대한 효율화는 필요하다”면서도 “재정효율화와 함께 사각지대 해소, 복지사업 확충노력이 병행돼야한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ankookilbo.com 채지선기자 letmeknow@hankooil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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