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뒷모습을 비추며 스크린이 열린다. 힘 없는 발걸음엔 체념의 기운이 역력하다. 남자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는 일본 전통 단팥빵 ‘도라야끼’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센타로는 묵묵히 빵을 만들고 말을 아끼며 빵을 판다. 70대 노파 도쿠에(키키 키린)가 이곳을 찾아오면서 무료한 것인지, 삶의 욕망이 없는 것인지 모를 센타로의 일상에 회오리바람이 분다.
영화의 초반부는 흐뭇한 웃음이 지배한다. 도쿠에는 센타로에게 “아르바이트 자리에 정말 나이 제한이 없냐”고 묻는다. 센타로가 무심코 “그렇다”고 하자 도쿠에의 얼굴은 기대로 부푼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센타로는 “시간 당 300엔(약 3,000원) 밖에 못 준다”라고 말하자 도쿠에는 “200엔(약 2,000원)만 줘도 저는 좋습니다”라고 맞받아친다. 당황한 센타로는 고용할 수 없다며 빵을 하나 쥐어준 뒤 도쿠에를 돌려보낸다. 며칠 뒤 도쿠에는 단팥 맛이 별로였다며 단팥소가 든 작은 그릇을 센타로에게 던져놓고 떠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단팥소의 맛을 본 센터로는 얼어붙고, 한참 시간이 흘러 도쿠에가 다시 찾아왔을 때 단팥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센타로와 도쿠에는 함께 일하기 시작하며 정의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계약서상 사장과 아트바이트 직원이나 단팥소 제조 과정에서 도쿠에가 스승이고 센타로는 견습생이다. 공식적인 지위와 실질적인 위치가 혼재되면서 두 사람은 동지적, 동업자적 관계에 이른다. 둘이 합작한 단팥빵은 기다란 인간 줄을 만든다. 하지만 센타로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불우 청소년 와카나(우치다 카라) 때문에 도쿠에가 한센병 환자 출신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영화는 씁쓸한 결말로 향한다.
단팥빵으로 인생을 은유하는 이 영화는 과거에 저당 잡힌 두 사람을 통해 희망을 비춘다. 폭력사건에 연루돼 평생 이고 가야 할 빚을 지고 있는 센타로는 도쿠에의 모습을 보며 삶의 의욕을 깨운다. 60년 가량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온 도쿠에는 생의 끝자락에 진정한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던 오랜 꿈을 센타로에 의지해 이룬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최신작이다. 나오미 감독은 칸국제영화제 신인상격인 황금카메라상을 28세에 최연소로 수상(‘수자쿠’)했고 심사위원대상(‘너를 보내는 숲’)까지 거머쥔 일본 예술영화의 얼굴이다. 전작들처럼 말을 줄이고 햇볕과 햇빛, 바람소리, 하늘, 초목 등을 통해 인물들의 희비와 인생의 맛을 전한다.
도쿠에가 떠난 뒤 센타로는 달콤한 단팥소에 소금을 넣은 빵을 만들려 한다. 인생은 달달하면서도 짜기도 한 복합적인 그 무엇일 것이라는 깨달음을 도쿠에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10일 개봉했다.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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