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여학생 자살 사건 모티브
민병훈 감독 '사랑이 이긴다' 투자
"병든 사회 속 인간의 가치 보여줘
가족·사랑·용서는 신앙의 관심사"
“영화와 신부도 낯선 조합인데, 투자와 신부라는 단어는 더 안 어울리죠? 저도 어색하네요.”(웃음)
천주교 사제들이 영화 투자자로 나섰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종단이 영화제를 기획한 일은 있어도, 성직자들이 영화 제작 및 투자에 뛰어든 것은 처음이다. 이 ‘성스러운 후원’의 대상은 예술성을 갖춘 작품들로 주목 받아 온 민병훈 감독의 ‘사랑이 이긴다’이다. 민 감독이 한 사제로부터 전해들은 여학생 자살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는 불신과 상처로 어그러진 가족의 고통을 묵직한 시선으로 담아내 호평받았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경쟁작으로 초청됐다.
신앙을 연상시키는 대사 한 줄 등장하지 않지만 인간의 생명, 사랑, 용서와 화해 등 영화가 담고자 한 주제의식이 성서적 가르침과 통한다고 본 한국가톨릭문화원이 제작에 투자했고, 극장 개봉을 위해 문화원장인 박유진 신부와 동창 신부 50여명이 힘을 보탰다. 수익은 모두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기부한다.
개봉을 하루 앞둔 9일 서울 구로구 구로CGV에서 열린 개봉동성당 시사회에 앞서 한국가톨릭문화원장 박유진 신부를 만났다. 그는 “종교를 떠나, 비인간성이 대세가 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의 가치, 함께한다는 것의 참 의미를 보여 주는 민 감독의 영화를 더 많은 분들이 보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투자 계기는.
“소위 막장이나 혐오라는 비인간적인 모습이 대세가 돼가는 현실 속에서 용서하는 것, 인간을 믿고 사랑하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세상과 공유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종교가 단지 본당(성당)을 중심으로 한 선교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술 콘텐츠를 통해 세상에 힘이 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계속해 병들어 있다면 특정 종교 신자가 는다고 해서 뭐가 자랑스럽겠는가. ”
-왜 하필 영화였을까.
“영상에 익숙한 세대들이 늘고 있다. 특히 어린이들은 윤리관, 인간관, 생의 목표 등이 형성되는 중요 시기에 폭력적인 콘텐츠에 매몰돼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에 안타깝고 미안했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가톨릭어린이영화제를 2회째 진행하기도 했다. 참가한 70~80여명 아이들이 모두 한 작품씩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레고 인형을 통해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은 아이가 기억에 남는다.”
-영화 선택 배경은.
“몇 해 전 강남의 유명 아파트에서 전교1등을 하던 학생을 포함해 여학생 3명이 잇달아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고, 담당 본당 신부님이 이 일을 매우 가슴 아파했다. 이를 전해 들은 민 감독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지고 상처받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했고 그 취지에 십분 공감했다.”
-신앙과 맥을 같이 하는 대목은.
“과연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것이, 가족이라는 존재가, 또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인데, 이는 동시에 신앙의 관심사다. 보기에 따라서 전혀 종교색이 없는 영화로 읽힐 수도 있지만, 가르침의 상징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는 장면을 종교 밖에서는 미학적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신앙인은 성령을 읽어낼 수도 있다.”
-교황청에서도 가족이 화두다.
“가족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다. 무너지면 전체의 희망 행복이 모두 무너진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 가족도 병들어있지는 않은지, 신뢰에 금이 가 있지는 않은지,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행복하냐’고 조심스레 묻는 아이는 사실 ‘나를 좀 품어달라’고 호소하는 중이라는 것을 어른들이 알아야 한다.”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모두 힘들다 보니 종교에 대해서도 날카롭고 냉소적인 반응을 많이 본다. 과거와 달리 불의나 악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의인들도 줄어드는데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참 부끄럽다. 우리시대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 약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인과 문화예술인들에게 가톨릭이 힘이 될 수 있다면, 희망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글ㆍ사진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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