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디서든 그림을 그려왔다. 구석기 시대의 원시인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며 각종 동물을 동굴 벽면에 그렸고, 안료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렸다. 작가 이어령은 글과 그림, 그리움이 모두 ‘긁다’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 모두 마음을 ‘긁어’ 냄으로써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사진을 현상한다는 것도 결국은 필름 위에 긁혀진 빛의 흔적을 드러내 펼쳐 보인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인간은 직조기술을 배운 이후에는, 천 위에 소망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실로 그린 그림, 자수였다. 여인들은 바늘과 실을 통해 규방 밖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자신들의 염원을 그렸다. 그리움은 현실의 강력한 힘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열패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열패감은 현실에 대한 열망을 뜨겁게 잉태해낸다. 그리움이 현실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다는 건 이 때문이리라.
‘규중칠우쟁론기’라는 제목의 조선후기의 한글수필이 있다. 이 작품에는 여인들의 생활현장인 규방에서 사용되는 일곱 가지 도구, 자와 가위, 바늘, 실, 인두, 다리미, 골무가 규중 여자의 일곱 벗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 옷을 만드는 데 자신이 세운 공을 내세우며, 인정해달라고 고아댄다. 이 모습이 마치 래퍼들의 배틀을 연상시킨다. 이 수필은 규방의 일곱 도구를 인간으로 의인화하여 자신의 공만 내세우는 시대의 세태를 풍자했다. 규방의 규(閨)는 문(門)자와 홀(圭)자로 이뤄져 있다. 홀은 왕이 들고 다니던 권력의 상징이다. 이는 안주인의 권력이란 의미를 넘어, 한 가문, 나아가 사회의 문화를 바꾸는 바느질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규중칠우쟁론기’에 등장하는 각 소품은 한 벌의 옷을 짓는 데 필요한 역할을 상징한다. 자는 미적 가치기준의 척도란 의미로, 가위는 전통과 현대란 두 개의 날을 갖고 그 중간을 치고 들어오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다. 실과 바늘은 이질적인 문화를 봉합하는 연결체, 인두는 다양한 미적 실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덮어주는 보완재, 골무는 우리의 변화무쌍한 유행의 폭력에서 우리를 지키는 정신의 방패다. 바느질은 그저 한 벌의 옷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조각을 이어 붙이고 조립하고, 다시 정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신념의 체계인 셈이다.
2년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본 오푸스 앙글리카눔(Opus Anglicanum?영국자수)을 잊을 수가 없다. 원래 교회에서 예배를 위한 의상에 천상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수놓았던 것인데,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면서 오늘날 유럽 자수 전통의 한 획을 그었다. 특히 정확한 묘사를 위해, 동물 데생에 토대를 두고 다양한 색의 비단실로 동물의 동세와 표정을 그렸다. 중세 말부터 자수에는 착용자의 권위와 사회적 위상, 교회의 말씀을 전달하는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위해 다양한 상징이 사용되었다.
최근 SNS에서 자수가 대세다. 유튜브 동영상으로 자수를 배운 아마추어에서, 힙합 싱어송 라이터에 이르기 자신들의 작품을 올리고 평가 받는다. 서구의 자수 열풍은 사회가 ‘그리워하고’ 있는 어떤 정신적 공백을 보여준다. 아이슬랜드 출신 팝 가수 비요크와의 협업으로 유명한 제임스 메리는 스포츠 로고에 섬세한 꽃문양의 자수를 둔다. 그는 자수로 하루아침에 온라인 스타가 되었다. 그는 자수 작업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관념을 함께 배치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도시 대 시골, 기계 대 수공예, 인간 대 식물 같이” 극단적인 것을 하나의 천 위에 놓다 보면 이들은 중첩되면서 완전 다른 형질로 변모하게 된다. 극과 극이 조화보다 서로 충돌만 일삼는 시대, 서구인들의 자수열풍은 사회적으로 가파른 호흡에 여백과 인내의 무늬를 긁어내려는 ‘그리움’의 소산은 아닐까? 우리사회에도 자수 열풍이 불면 좋겠다. 주말이 되면 방바닥만 긁지 말고, 우리의 꿈의 코드를 천 위에 긁어보는 거다. 자수하여 우리 내면의 광명을 찾아보자.
김홍기·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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