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는 책이 조선시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이 노상 눈에 안차는 모양이다. 매 편지마다 이런저런 훈계와 가르침이 꼼꼼하다. 읽어가던 중에 한 문장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백광훈이라는 조선중기 문신이 자식에게 썼는데 그 말미에 ‘다 말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할 말을 다해놓고 다 말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교묘하고 훌륭한 문장인가!
할 말이 더 있으나 참겠다는 뜻이다. 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헤아려 다음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해 보라는 뜻이다. 너도 웬만큼 머리가 컸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다 말하면 관계가 원만해질 수 없으니 당신도 말을 삼가겠다는 뜻. 나는 이 마지막의 의미로써 ‘다 말하지 않는다’가 매력이 있는 문장으로 읽혔다. 어른다운 솜씨의 마무리랄까. 글에서 인품이 묻어났다고나 할까.
며칠 전. 마지막 공연이 올라가기 전 배우들과 함께 모여 한마디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나는 이 ‘다 말하지 않는다’를 유추 해석하여 같이 교감하고 싶었다. 배우가 마지막 공연이라고 다 말하려고 하지 맙시다. 만끽하지 말고 하던 대로 잘 마무리 합시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순간 그 말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았다. 하게 되면 나는 말을 다 해버리는 셈이 되지 않나. 결국에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간단한 농담만 던지고 말았다. 파이팅만 했다. 다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에게 의미심장한 경험이 되었다. 결국 ‘다 말하지 않는’을 실천하려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수 없다. 마음속에 묻은 채 기다려주고 상대가 결정할 여백을 남겨두어야만 한다.
어제는 ‘일화구청(一話九聽)’을 모토로 산다는 어르신과 술잔을 기울였다. 한번 말하고 아홉 번, 듣는다는 뜻이란다. 대저 그 어르신은 조용하시고 말도 잘 하지 않는다. 가끔 미소만 지으신다. 그런데 카리스마가 있다. 경청이야말로 관계를 좋게 맺는데 대단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그 분이 조용해서일까 나는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 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많이 공허해졌다. 역시 말이란 하면 할수록 경박해지고 속이 텅 비는 느낌이다. 괜히 미안해서 정릉 꼭대기까지 모셔다 드렸다. 오면서 생각하니 그 분은 다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비한 매력이 생겨났다. 가만히, 하고 싶은 말의 마지막은 남겨 두는 일, 참 멋스럽다.
남을 추궁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있다. 대개는 기승전결의 스토리텔링도 뛰어나고 자기논리도 분명하시다. 물론 경험도 많다. 타인은 변명도 못하고 궁지로 몰린다. 그러다가 타인이 꼬리를 내린다 싶으면 득의양양해져서 할 말을 두 배로 늘리고 자신의 대단함도 서슴없이 피력한다. 듣다 보면 어느 새 이야기는 딴 길로 새 있다. 듣던 이가 맥락이 흐트러져서 집중을 못한다 싶으면 다시 원점으로 이야기를 되돌린다. 이런 태도, 좋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 한마디를 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굳이 결론이 난 이야기를 그것도 여러 번 확인하는 것은 좋지 않은 괴벽이 틀림없다.
속생각을 다 말해버리면 연극도 재미가 없어진다. 배우가 말을 줄였을 때 관객은 그 말의 행간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저런 상상의 놀이에 빠져든다. 배우가 다 보여주면 관객은 내내 팔짱만 낀 채 멀어진다. 말을 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이 결정을 하십시오, 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같이 하던 대화를 마무리 짓고 함께 살아가는 미덕을 도모하는 일이다. 우유부단한 마무리도 단호함 보다는 좋을 때가 많다. 좋아 보이는데? 낫지 않나? 이런 식은 어때? 괜찮을 것 같아서 등등. 그러면 어느 새 상대가 맞장구를 치며 대화 속으로 들어온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 말하지 않으니 아들은 좀 더 주체적인 성찰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자꾸만 말이 늘어난다. 다 말하지 않는 지혜를 배우고 싶은, 어느 새 가을이다.
고선웅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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