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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잘린 성폭행범… 과잉방어-정당방위 판결 뒤바뀜 속 영화화도

입력
2015.09.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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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26일 새벽 1시 10분, 귀가하던 경북 영양군 영양읍의 주부 변모(당시 32세)씨는 집 인근 골목길에서 두 남자(신모, 권모)로부터 ‘강제추행(사실상 강간미수)’을 당한다. 남자들은 반항하는 변씨를 넘어뜨린 뒤 무릎으로 가격해 우측흉부좌상 등 전치2주의 상해를 입혔고, 그 와중에 신씨는 강제로 키스를 하려다 변씨에게 깨물려 혀가 잘린다.

변씨 역시 신씨의 고소로 구속 수감됐다. 신씨 변호인은 사건 당시 ‘가해자’ 변씨가 동서와의 불화로 술을 마셨고, 먼저 신씨 등에게 부축해달라고 청했다는 점 등을 들어 ‘피해자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검찰은 ‘과잉방어’였다며 변씨에게 1년형을 구형했고,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 합의부(재판장 이유주)는 88년 오늘(9월 10일) 변 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남녀 평등 단일 법안인 ‘남녀고용평등법(1987년)’이 제정되면서 변화의 기대로 막 부풀던 한국 사회는(엄밀히 말하자면 여성계는) 경악했다. 88년 4월 창간하는 ‘여성신문’은 창간 준비호를 통해 변씨의 어이 없는 사연과 재판 과정을 돋보이게, 집요하게 보도했다. 변씨도 항소했다. 대구고법은 원심을 파기하고 거꾸로 두 남자에게 징역 2년 6월과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두 남자는 상고했지만 대법원(대법원장 윤관)은 89년 8월 8일 변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재판장 윤관)은 “(…)정조와 신체를 지키려는 일념에서 엉겁결에 갑의 혀를 깨물어 설절단상을 입혔다면 병여(변씨)의 범행은 자기의 신체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에서 벗어나려고 한 행위로서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목적 및 수단, 행위자의 의사 등 제반 사정에 비추어 위법성이 결여된 행위이다”라고 판결 요지를 밝혔다.

변씨 사건은 90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사진ㆍ김유진 감독)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 포스터에는 “법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면,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혀’만을 보호하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변씨 사건 판례는 하지만 성범죄에서 피해자의 저항이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하는 근거가 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성폭행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완강히 저항해야 한다’는 그릇된 예방교육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성폭행이 성을 매개로 한 폭력행위 즉 폭력으로 상대를 억압하려는 행위라는 점에선 일반 폭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저항이 완강할수록 피해도 더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 온당하게 고려되지 않고 있다.

지난 8월 18일 서울 서부지법 형사11부는 처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49)씨에 대해 피해자가 강제추행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부 행위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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