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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의 시네마니아] 한국사회 자화상 '오피스'

입력
2015.09.0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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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피스'의 이미례(고아성)는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정직원이 되기를 고대한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영화 '오피스'의 이미례(고아성)는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정직원이 되기를 고대한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1998년 여름 극장가는 공포영화 ‘여고괴담’이 점령했다. 대다수 청소년들이 매일같이 다니는 학교가, 외딴 흉가나 후미진 골목길보다 무서운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한 아이는 급우들의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하고 유령이 된 뒤에도 학교를 떠나지 못한다. 어느 남자 교사는 훈육을 핑계로 아이들을 구타하고 성희롱 행동도 예사로 한다. 유령이 떠도는 학교에서 교사가 잇달아 죽음을 맞는다. 입시에만 몰두하고 인성교육은 외면하는 한국 학교의 지옥도를 세묘하며 영화는 어린 관객들의 환대를 받았다.

‘여고괴담’은 5편까지 제작됐다. 충무로에서는 흔치 않은 시리즈 영화로서 장수했다. 김규리 박진희 최강희 김옥빈 차예련 등을 발굴하며 여배우 등용문 역할도 했다. 학교를 무언가 배우고 친구들과 교류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즐거운 공간이 아닌, 입시전쟁을 대비하는 훈련소로 기억하는 관객들의 통점을 자극하며 인기를 누렸다. ‘여고괴담’ 이후에도 ‘고사: 피의 중간고사’(2008) 등이 학원 공포물의 맥을 이었다. ‘스승의 은혜’(2006)는 흥행에선 재미를 못 봤으나 담임교사의 비정한 지도로 비뚤어진 삶을 살게 된 제자들이 복수에 나서는 과정을 그려 눈길을 끌었다.

상영 중인 영화 ‘오피스’를 보면서 ‘여고괴담’ 열기가 떠올랐고 마음에 어두운 기운이 드리웠다. 치열한 입시경쟁에 멍든 교육 현장을 많은 사람들이 공포의 공간으로 인식했던 것처럼 이제 사무실이 죽음의 기운이 깃든 장소로 여겨지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짧지만 한 때 한국은 취업 안전지대였다. 1997년 외환위기(IMF)를 거치며 거품을 확인하기 전까지 취업이 대학가의 화두가 아니었다. 하지만 취업대란과 조기 퇴직의 시대를 맞으며 대한민국은 ‘입시지옥’과 ‘입사지옥’의 나라가 됐다. 직장은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을 위한 장소가 아닌 그저 목숨 걸고 한자리 차지한 뒤 지켜야 할 무엇이 됐다. “내가 죽으려고 일하는지 살려고 일하는지 모르겠다”는 ‘오피스’의 대사는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미생’은 젊은 세대의 힘겨운 취업 과정과 고단한 직장 생활을 응시한다. 주인공 장그래(임시환)는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 선배들을 통해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오피스’를 보다 보면 ‘미생’은 하나의 판타지일 뿐이다. 별다른 배경도 없는 인턴사원을 위해 선배들이 마음을 쓴다고? 현실에선 언감생심의 일이다. ‘오피스’는 2015년 한국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직시한 공포물이다.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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