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이 많이 책정되어도 다 쓰지 못하고 국고에 반납하는 일이 매년 반복돼 ‘헛배만 부르다’는 농림축산식품부의 ‘헛배 예산’이 정부 예산안 기준으로 불과 1년 만에 반토막 났습니다. (관련기사▶ 헛배 예산, 있다? 없다?) 예산당국인 기획재정부가 농식품부 요구보다 재해대책비를 삭감 편성한 것은 3년 만에 처음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헛배 예산’은 자연재해로 농작물이나 가축, 농업시설물 등에서 피해가 생기면 복구비용으로 쓰기 위해 마련된 농식품부 소관 재해대책비 예산을 가리키는 은어입니다. 재해대책비에 ‘헛배’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는 이렇습니다.
정부의 예산안은 매년 6월 각 정부부처가 이런 저런 사업에 얼마씩이 필요하다며 예산요구서를 기재부에 제출하면, 기재부는 각 사업의 필요성 등을 심사해 9월 중 국회에 정부 예산안을 제출합니다. 각 정부부처는 가능하면 예산을 더 따내려고 노력하는 반면, 기재부는 예산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불요불급한 예산은 가급적 삭감하는 ‘짠돌이’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때문에 기재부는 각 부처가 요구한 예산을 깎으면 깎았지, 올려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재해대책비 예산은 이상하게도 농식품부가 요구한 액수보다 기재부가 예산을 더 얹어주는 일이 2년 연속 반복됐습니다. 작년엔 농식품부가 2,176억원을 요구했는데, 기재부는 724억원을 더 얹은 2,900억원을 편성했습니다. 올해 예산에선 농식품부는 1,976억원을 요구했는데 200억원을 더 얹은 2,176억원을 내줬습니다.
농식품부 입장에선 예산을 많이 받으면 좋은 것 아니냐고요? 재해대책비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재부가 잔뜩 불려 놓아도 어차피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뭉텅뭉텅 잘려나가기 때문입니다. 2014년엔 2,900억원에서 2,176억원으로 삭감되고, 올해엔 2,176억원에서 1,092억원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최근 몇 년 간 대규모 태풍이 오지 않아 이렇게 삭감된 예산마저도 다 쓰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실제 2013년엔 예산의 58%인 1,273억원이, 2014년엔 89%인 1,932억원이 쓰이지 않아 불용(不用)처리 됐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국회예산정책처 등은 기재부가 예산 증ㆍ감액이 쉬운 예비비 성격의 재해대책비를 ‘완충재’로 삼아 실제 필요 이상으로 부풀린다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재부가 국회 예산 심사과정에서 재해대책비에서 줄인 예산으로 국회의원의 ‘민원 사업’에 예산을 배정해준다는 겁니다. 민원 들어주려고 농림축산식품 분야 예산 총액을 늘릴 수 없는 노릇이니 일종의 재해대책비 예산을 일종의 ‘비상금’처럼 챙겨간다는 것이지요.
논란이 계속되면서 결국 내년 정부 예산안의 재해대책비 예산(1,085억원)은 올해(2,176억원ㆍ정부안 기준)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더구나 이는 당초 농식품부가 요구한 1,095억원 보다 10억원 줄어든 규모이고요.
기재부도 ‘헛배 예산’논란이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기재부 예산실 관계자는 “재해대책비의 집행 실적과 내년 재정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예산을 예전보다 줄였을 뿐”이라며 헛배 예산의 존재는 여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재해대책비 예산은 헛배가 꺼진 셈이지만, 올해 국회의 예산 심사과정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농식품부 사업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예산 규모가 올해 1,641억원에서 내년 4,193억원으로 무려 2배 넘게 뛰어 오른 쌀소득보전변동직불금 예산이 그런데요. 과연 쌀소득보전변동직불금 예산이 제2의 헛배 예산이 될 지 지켜볼 일입니다.
세종=이성택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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