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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극단의 시대

입력
2015.09.0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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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접촉이 열린 7일 오후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평화전망대에서 북한 개풍군 광덕면 마을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접촉이 열린 7일 오후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평화전망대에서 북한 개풍군 광덕면 마을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8월 25일 남북공동합의문에서 북한이 지뢰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건 자신이 사건을 저질렀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유감은 사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남한의 보수 정부가 앞으로 이 유감 표명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김양건이 몰랐을 리 없다. 더군다나 무박 4일이나 합의문에 세심한 공을 들인 건 사실상 평양이었다. 이는 김정은의 첫 대남협상이었다.

메르스 사태를 거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6공화국 이래 집권 3년차 최저치에 근접해 있었다. 남북공동합의문 발표와 중국 방문 이후 지지율은 역대 최고치 수준으로 수직상승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직후 달성한 지지율이다. 그야말로 깔딱고개를 넘었다.

대통령에 대한 마음이 급변한 시민들을 보면서, 콘크리트 지지층이나 기울어진 언론 지형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현 상황을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인터넷에서 남한 지뢰에 의한 사고일 수 있다는 의심이 연기처럼 사라진 자리, 그 동안 유화적 대북정책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학적 딜레마가 드러났다.

지난 날 남북관계는 교환의 상호성이 성립하지 않는 문제에 시달려왔다. 사회는 관계들이 모여 구성하는 것이고, 관계는 상호적 교환에 의해 만들어진다. 쉽게 말해 서로 공평하게 주고 받는 것이다. 주고 받는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양자가 어느 정도 대등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은 우리와 대등하지 않다.

단순히 가난하다는 말이 아니다. 북한은 국가로서의 목표가 생존이다. 좀 더 정확히는 평양에 살고 있는 엘리트들의 생존이 최대 목표이다. 나머지 국민의 생존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북한 엘리트들은 남한과의 관계 개선이 자신의 생존을 완전히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믿는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에 달려 있다. 이들이 남한과 미국을 동시에 상대하려는 이기적 선택을 해온 이유이다.

이는 남북간의 신뢰와 호혜성을 필요에 따라 위배해버리는 행동들로 이어졌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이후로, 남북 경협과 군사적 긴장을 병행하려는 북한의 이기적인 태도를 남한 시민들은 10년 넘게 지켜봐야 했다. 그 동안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남한 내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고 북한이 방향 전환을 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했던 장기적 전략가들은 시민사회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걸 초조하게 지켜봐야 했다.

역사는 엉뚱한 데서 방향 전환을 시작했다. 노구를 이끌고 북한을 품위 있게 대하려 노력했던 이희호 여사를 외면한 ‘소년 장수’는 어처구니 없음으로는 국제관계사에 길이 기록될 군사적 모험을 감행한다. 중국이 패닉 직전의 금융시장과 올림픽급으로 공들인 전승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때에, 그리고 합동군사훈련으로 미국과 남한의 경계 수준이 한껏 높았던 시기를 골라 군사적 긴장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군사적 도발을 보수 정권 대표단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회담을 마무리지었다.

합의문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당 대표는 부끄러운 역사는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여당의 연구소는 포털 뉴스 규제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의 높아진 지지율에 기댄 보수 이데올로기의 강공을 보면서, 오히려 야권의 대북전문가들은 기존의 믿음을 강화하는 것 같다. 이들은 여전히 북한이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행위자라는 점을 분석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대신 저런 주장을 하는 보수의 대북 정책은 역사적, 도덕적으로 실패할 것이라는 역사철학적 낙관론으로 대응한다.

20세기 초 유럽의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에 무릎 꿇었다. ‘극단의 시대’에서 에릭 홉스봄은 그 이유가 하이데거나 젠틸레의 이념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럽 전체주의자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은 것은 “기차가 제 시간에 운행하도록 만든” 탁월한 기술관료적 능력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과잉 우경화가 북한의 협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어리석고 이기적인 소년 장수가 앞으로도 남한 보수주의자들의 처방을 따랐을 때, 우리가 뉴스 대신 고쳐 쓴 역사책이 올라온 포털을 보며 사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더 크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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