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happy)700’이라지만 평창 땅이 고루 높은 것은 아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대관령면, 오대산과 월정사를 끼고 있는 진부면이 대표적인 고지대에 속하고 실제 평창군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일찍부터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덕이 컸다. 정작 군청소재지인 평창읍은 평창에서도 소외된 지역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평창읍과 미탄면 등 평창군 남부지역으로 하늘과 강, 땅속 여행을 떠났다.
▦장암푸르나에서 평창의 가을 하늘로
“자 뛰세요 뛰세요, 달려요 달려!” 조종사의 다급한 명령이 발걸음보다 빠르다. 벼랑 끝을 향해 약 10m 전력 질주한다. 낭떠러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몸은 어느새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도 패러글라이딩이 가능할까’하는 의구심은 기우였다. 귓전을 울리는 바람소리가 의외로 크다.
“엉덩이 끌어 당기세요.” 안전 복장에 거북이 등처럼 붙어있던 장치의 실체를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글라이더에 팽팽하게 연결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의자다. 잠깐의 두려움도 발아래 펼쳐지는 장쾌한 풍광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평창읍내를 휘감은 평창강 물줄기와 조금씩 누런빛을 더해가는 들판이 이미 가을 색이다. 주위는 온통 높은 산에 둘러 싸였는데 노성산 자락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읍내는 군청소재지답지 않게 소담스럽다. 창공을 선회하는 동안 서서히 고도가 낮아지고 착륙지점이 가까워져 아쉬움이 커질 즈음, 온몸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허공에서 몇 차례 좌우로 요동친다. 두려움과는 또 다른 짜릿함이 머리끝까지 전해진다. 지그재그 비행은 초심자들을 위한 고객서비스다.
평창읍내 동편의 장암산은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에게 늘 사랑 받는 곳이다. 평창강에서 거의 수직으로 솟은 절벽을 타고 오르는 열기가 패러글라이딩에 더없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활공장은 정상 부근 해발 750m 지점이고, 착륙장은 바로 아래 해발 300m 지점이다. 몇 가지 안전 수칙만 지키면 초보자도 쉽게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점프하지 말고 벼랑 끝까지 달릴 것, 임의로 이륙했다고 판단해 주저앉지 말 것, 무서우면 앉지 말고 제자리에 멈출 것’ 등 이륙할 때 몇 가지만 주의하면 나머지는 조종사가 컨트롤한다. 이륙한 후부터는 창공을 나는 기분을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체공시간은 약10분, 열기의 조건이 좋을 때는 2,800~3,200m 높이까지 날기도 하는데 평균적으로는 1,600~2,000m 사이까지 오른다.
“바람을 타기에는 문경이 좋고 경치로는 단양이 그만인데, 장암산은 2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 조나단 패러글라이딩 학교(hp700.com) 김동술 학교장의 평가다. 그래서 마니아들 사이에선 안나푸르나에 빗대 ‘장암푸르나’로 통한다.
▦시간조차 멈춘 자연 동굴의 원형, 백룡동굴
“자 수그리세요, 수그려. 미리 일어서면 다쳐요” 조명등을 비추는 동굴해설사 이행자씨의 주의는 탐사 내내 이어졌다. 평창 미탄면 백룡동굴은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관광동굴이 아니다. 동굴 안 탐방로에는 최소한의 안전시설물만 설치했다. 신비감을 강조하기 위한 빛 고운 조명은 고사하고, 희미한 불빛 하나 없다. 오로지 헤드랜턴과 해설사가 추가로 들고 있는 조명등 하나만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그래서 관광보다는 탐사에 가깝다.
1976년 인근 주민들에 의해 발견된 이후 천연기념물 제260호로 지정됐고, 수 차례 학술조사를 거쳐 2010년 생태체험학습장으로 개방됐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이상 어느 정도 훼손은 불가피하겠지만 수 억년 자연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이정도 불편은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탐사 준비는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관리사무소부터다. 안전을 위해 상하 일체형 ‘동굴복’으로 갈아입고 헤드랜턴이 장착된 헬멧과 장화까지 착용한 후에야 출발이다. “광원복장이라 생각하면 탄 캐는 사람으로 보이고, 소방복이라 생각하면 불 끄는 사람으로 보이겠죠. 저는 우주복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우주인이 되겠죠?” 해설사의 입담에 재치가 넘친다. 동굴까지는 약500m, 작은 도선을 타고 동강을 거슬러 올라야 닿는다. 도선이 다니지 못할 때는 바위절벽에 설치한 데크를 이용한다.
동굴입구는 비밀번호 잠금 장치가 부착된 철문으로 막혀있다. 들어가기 전 해설사의 당부사항이 다시 한번 이어진다. 동굴내부의 종유석이나 석순은 절대 만지지 말라는 게 우선이다. 손에 붙은 미생물이 동굴생태에 영향을 줘 색이 변하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먹는 것도 금지다. 동굴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석회 성분이 많아 뱃속이 굳어질 수도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인다.
어둠은 공간과 시간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동굴의 신비는 빛에 좌우되고, 그래서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해설사가 조명을 비추는 방향에 따라 종유석 하나가 고드름으로 보이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한다. 부처님이 버티고 섰다가 김삿갓으로 변신하고, 신의 손에서 조명이 넓어지면 문득 피아노가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달걀부침이고 달리 보면 거대한 영지버섯이다. 갖가지 모양의 종유석과 석순 석주에 해설사의 달변까지 더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 사이에 몇 번은 무릎으로 기어야 하고, 두어 차례는 ‘개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완전 포복도 해야 한다. 그렇게 750m를 들어가면 대형광장을 만난다. 탐방객이 갈 수 있는 끝이다. “자, 이제 모두 랜턴을 끄고 눈을 감으세요” 아이러니하게도 백룡동굴 탐험의 하이라이트는 암흑의 시공간에 있다. “이제 눈을 뜨고 20초간만 침묵해 보겠습니다.” 그랬다. 눈을 떴는데도 보이는 게 없다. 완벽한 어둠이다. 모든 게 정지된 느낌이다. 기온도 항상 12.5℃를 유지하고 있다니 이곳에선 시간의 흐름도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 동굴 속을 울리던 해설사의 음성도 이명이 되어 사라질 즈음이었다.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암흑의 시공간이 좀 더 지속되길 바랐지만 광장 한 구석 흘러내리듯 만들어진 유석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백룡동굴의 유일한 조명시설이다. 조명은 곧 꺼지지만 잔상은 오래 남는다. 수 억년에 거쳐 만들어진 비밀의 지하세계가 언제까지나 간직되길 바라며 발길을 돌린다. 다시 도선을 타고 매표소로 돌아왔을 땐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평창=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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