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거리들은 혼란의 도가니입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난동을 피우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무력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도처에 지금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들끓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에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가 없다면 우리나라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연설을 듣던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1960년대 하버드대 법대 졸업식의 연설이었다. 당시는 민권운동과 반전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그 연설은 한 법대생의 연설이었다. 소련에 대한 두려움에 긴장하고 있을 때였으니 더 감동적이고 애국심이 일었을 것이다. 그래서 열렬한 지지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 학생은 청중들의 박수가 끝나자 이렇게 말했다. “지금 말한 것들은 1932년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한 것입니다.”
긴장과 불안으로 지켜보던 남북의 일촉즉발의 대결 양상이 긴 회담 끝에 마무리되었다.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말처럼 전쟁은 대재앙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맹목이고 위험하다. 그래서 평화의 시기에 실력을 키워둬야 평화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패러독스를 담고 있다.
서른 배 넘는 국방예산을 쓰면서도 단독으로 맞붙으면 승리하지 못한다는 말을 태연히 해대는 장성들과 온갖 비리로 방위산업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썩은 군인들의 농단은 외면하면서 입으로는 늘 자주국방이다.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모를까 심지어 자신들의 정치적 안위를 위해 ‘적’에게 휴전선에서 총질을 해달라고 부탁하던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건 또 어쩔 것인가. 진정한 평화를 해치는 건 그렇게 신성한 국방 자체를 훼손하고 농단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또 그런 조짐이 보인다. 언론이 그 앞잡이가 된 건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내년과 내후년 중요한 선거가 있으니 더 신나게 그 위기를 강조한다. 어쩌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더니 평화적으로 해소되니 이제는 마치 자기들이 그 평화를 만들어냈다고 선전해댄다. 냉탕 온탕을 번갈아 오가면서도 책임은커녕 자랑하기에 바쁜 놀라운 신공을 보인다.
정의와 자유를 억압하고 거짓과 술수로 농간하면 그 사회는 신뢰를 잃는다. 사회적 불신은 엄청난 비용을 치른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 왜 믿지 않느냐고 타박하고 윽박지르기 전에 그렇게 만든 자신들의 허물을 먼저 반성해야 한다. 자기들이 정치와 경제를 엉망 쑥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회적 비용을 치른 건 외면하고 일부 노동자들의 극렬한 저항 때문에 2만 달러 소득의 문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우겨댄다. 그러면서 긴장과 불안의 기회는 극대화시킨다. 히틀러의 연설도 그들의 귀엔 솔깃할 것이다.
‘갑자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여는 애당초 계획에 없었다. 러시아가 전승절 행사에 초대했을 때 그러면 중국에도 가야 한다고 거절했던 게 엊그제다. 그런데 상황이 예기치 않게 변했고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건 그만큼 우리가 주변국의 상황에 아주 예민하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시 주석의 왼편에 앉았느니 새로운 한중시대를 열었느니 하는 용비어천가 타령만 쏟아진다. 왜 그래야 했는지 국제적 상황에 대해 국민이 정확하게 인식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러고들 있다. 구한말의 상황과 뭐가 다른가.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피예르의 입을 통해 말한다. “자기 주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영원히 규명하기 어려운 위대하고 무한한 삶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아내 나타샤에게 말한다. “선을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 손을 잡아라. 그리고 적극적인 선행의 유일한 기치로 삼아라.” 권력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갖출 때 진짜 평화가 온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히틀러들’을 본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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