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많은 유령들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르몽드의 1980년 12월 로맹 가리 영결식 기사에는 “그를 숭배하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진다. 하지만 맨 앞 자리에 실명으로 소개됐어야 할 한 사람이 빠져 있다. 한 해 전 숨을 거둔 그의 아내 진 시버그(Jean Seberg, 1938~1979ㆍ사진)였다.
시버그는 가리만큼, 어쩌면 더 자유를 갈망한 영혼이었다. 미국 아이오와의 보수적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무렵 이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회원이었다. 18살에 오토 플레밍거의 영화 ‘잔다르크(1957)’로 데뷔해 ‘슬픔이여 안녕’(58) ‘네 멋대로 해라(59)’로 유명해진 뒤로도 여러 반전ㆍ인권단체를 후원하거나 가담했다. 도미니크 보나는 평전 ‘로맹 가리’에서 그녀를 “약자를 보면 그 누구도 진정시킬 수 없는 연민을 느끼는(…),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여자였다”고 썼다. 그는 좌익으로 몰려, 숨질 때까지 늘 미연방수사국(FBI)의 감시 속에 살았다.
둘이 만난 건 59년 12월 한 모임에서였다. 45살의 가리는 이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은 외교관이자 공쿠르상 수상작가였지만, 21살의 시버그는 갓 주목 받기 시작한 배우였다. 그리고 둘에게는 배우자가 있었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이던 가리는 러시아인 사이에서는 유대인이었고, 유대인 사회에서는 무신론자였다. 그 소외감과 열등감은 때로는 거친 반항과 냉소로, 또 때로는 주류 사회를 향한 은밀한 동경으로 드러나곤 했다. 시버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그에게서 연민해야 할 ‘아이’를 보았고, 그는 시버그에게서 성숙한 자유의 열정을 보았다. 둘은 3년 뒤 결혼했다.
하지만 시버그는 “로맹 가리가 진정성의 유혹이라 부른 것, 예술가라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더 이상 연극 무대가 아니라 삶의 무대에 뛰어들고자 하는 욕망과 드잡이하는 배우”였다. 그는 히피들이 마리화나를 물고 사랑과 평화의 이름으로 권위에 저항할 때, 총을 든 ‘블랙팬서스’의 곁에 섰다. 툭하면 집을 비우고 며칠씩 말도 없이 외박하는 그녀 곁에서 고통스러워하던 가리는 ‘흰 개(69)’라는 작품에서 “도울 수도, 변화시킬 수도, 결별할 수도 없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썼다. 둘은 이듬해 7월 이혼했고, 8월 스캔들이 터졌다. 시버그가 블랙팬서스 흑인 단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FBI가 퍼뜨린 그 소문은 LA타임스 등에 보도까지 됐다. 시버그가 조산한 백인 아이는 이틀 뒤 숨졌고, 시버그는 극심한 우울증 속에 이후 7차례나 자살을 기도한다.
1979년 8월 30일 실종된 시버그는 9일 뒤인 9월 8일 파리의 집 인근에 주차된 르노승용차 뒷좌석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1년 뒤 자살한 가리는 “진 시버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로 시작해서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짧은 유서를 남겼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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