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아성인 1980년대 외과, 실력 갖추고 성차별에 맞서 진입
환자와 관계 오래 유지하려 선택… 2003년 갑작스런 유방암 판정
끝내 의사 복귀는 못했지만… 재활 프로그램 개발에 열정
캐럴린 캘린(Carolyn Kaelin)은 미국의 유방암 연구자겸 전문의였다. 그는 의약분야의 고질적인 성 차별을 딛고 30대에 하버드 의대 부설 암 치료ㆍ연구기관의 창립이사에 발탁돼 주목 받았다. 40대에 유방암에 걸린 뒤 환자 권익과 삶의 질 개선 활동에 힘썼다. 사인은 뇌암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든 뇌를 신약 테스트 등 새로운 치료ㆍ시술에 내맡겨 뇌종양 치료법 발전에 기여했다. 7월 28일, 54세의 캐럴린 캘린이 별세했다.
캘린은 1961년 4월 4일 미국 뉴욕 주 시러큐스에서 태어나 뉴저지 프랭클린 레이커스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의약품 홍보업자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스미스대학에서 경제학과 생화학을 전공한 뒤 존스홉킨스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의대 재학 중 남편 윌리엄 캘린(William Kaelin)을 만나 88년 결혼했다. 남편 윌리엄은 하버드 의대 교수 겸 브리검 여성병원 내과주임이 됐다. 캘린 부부는 그러니까, 고액 연봉의 전문직 종사자로 미국 중산층의 전형이었고, 앵글로색슨 백인이었다. 예일대를 졸업한 딸과 예일대에 입학한 아들도 캘린 부부의 자랑거리였다.
먼저 딴 얘기를 잠깐 하자. 미국 스키드모어(Skidmore) 대학 사회심리학과 조교수인 코린느 모스 라쿠신(Corinne Moss Racusin)은 2012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과학 관련 기관들의 성차별 실태’라는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STEM’즉,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matics) 분야의 연구기관 127곳을 무작위로 추출해 연구소 소장급 포지션에 이력서를 보내 취업 평가를 받았다. 그가 준비한 이력서는 두 종류였다. 연령과 학력 성적 경력 등이 똑 같은, 다만 지원자의 이름만 다른 두 통의 가상 이력서였다. 하나의 이름은 ‘John(남자)’이었고, 또 하나는 ‘Jenifer(여자)’였다. (미국의 취업지원서와 이력서는 지원자의 성별이나 증명사진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 ‘존’이 채용 점수, 연봉 등 모든 항목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존에게 제시된 연봉 평균은 3만238.1달러인 반면 제니퍼는 2만6,507.945달러였다. 라쿠신의 실험은 그 해 2월 백악관 과학기술자문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대한 일종의 항변이었다. 백악관 보고서의 요지는 “(지금 추세라면) 2020년대 10년 동안 약 100만 명의 과학기술인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거였고, 라쿠신 보고서 이면의 메시지는 과학적 객관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과학기술분야의 리더들이 성 차별의식만 극복해도 인력 부족의 상당부분은 해소될 것이라는 거였다.
STEM의 ‘S’에는 당연히 의학도 포함된다. 캘린이 의대를 다니던 무렵의 성차별은 지금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80년대 미국 의대에서 외과는 남자들의 아성이었고, 여성이 진입하려면 실력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차별에 맞설 용기와 배짱이 필요했다고 한다. 남편 윌리엄은 선임 의사가 환자에게 인턴을 소개할 때, 남자일 경우는 ‘의사’라고 소개하지만 여자라면 그냥 ‘이름’을 부르는 식의 은밀한 차별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뉴욕타임스, 2015.8.9)
캘린은 그 금녀의 벽을 넘어선 여성 외과의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95년 그는 하버드 의대 교육병원인 보스턴 브리검여성병원과 병원 부설 종합유방건강센터 창립이사가 됐는데, 당시로선 여성이 그 보직을 맡은 사실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다. 당시 그는 34세였다. 2001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새로운 세기의 여성 15인’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캘린이 유방암 전문의를 택한 것은, 대표적인 여성암이라 환자들이 여성 의사를 선호하는 분야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즈음 가장 뜨거운 개척분야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다만 그는 환자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분야라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고 말했다. 99년 보스턴글로브 인터뷰에서 캘린은 “탈장 수술이나 담낭절제술과 달리 유방암은 진료를 한번 시작하면 생을 두고 환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야다. 그래서 끌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가, 더군다나 한쪽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두고 대등한 관계를 맺기란 극히 어렵다. 조직검사 결과가 안 좋거나 수술 후 예후가 나쁠 때도 많아 “감정적으로 얽히게 되면 그럴 때 정말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브리검여성병원 수석외과의 마이클 진너(Michael Zinner)는 “캘린의 온화함과 배려에 환자들은 그와 사랑에 빠지곤 했다. 캘린이 자기 아이들을 다 재운 뒤 밤 10시에 전화를 건 적도 있다는 말을 환자로부터 듣기도 했다. 아이들과 침대에 있으면서도 환자를 생각했다는 얘기였다”고 말했다.(뉴욕타임스)
그는 수영 사이클 등 운동을 즐겨 여성종양학자 사이클 동호회 멤버로도 활동했다. 다나 파버 암연구소 자선기금 모금 대회로 매년 192마일을 달리는 ‘팬-매스 챌린지(Pan-Mass Challenge)는 그가 빠뜨리지 않고 출전하는 종목 중 하나였다. 2003년 대회를 앞두고 연습을 마친 어느 날 그는 가슴 한쪽이 당기는 느낌을 받는다. 심상찮은 기미를 느낀 그는 다음날 곧장 방사선 검진을 받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X선 검사가 모든 유방암을 다 찾아내진 못한다는 건, 의사로서 그가 환자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말이었다. 그는 초음파와 조직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유방암 판정을 받게 된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내가 환자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암세포 절제 수술과 방사선 치료, 약물 치료를 이어가던 중 그의 증상이 악화했다. 첫 진단에서 확인되지 않은 두 개의 암 덩이가 새로 발견됐고, 그는 유방절제수술을 받았다.
환자로 지내는 동안 그는 두 권의 책을 썼다. ‘Living Through Breast Cancer 유방암 이겨내기’와 ‘The Breast Cancer Survivor’s Fitness Plan 유방암 완치환자의 운동법’이었다. 첫 책은 환자로서 느낀 증상과 치료, 후유증 등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대응법 등을 기술한 거였고, 두 번째 책 역시 체험을 통해 통증 등 증상을 완화하고 치료에 도움을 주는 운동 요법을 소개한 거였다. 유방암 수술 후 겨드랑이 통증과 림프부종을 완화하는 데 노젓기 운동이 효과적이라는 것은 그가 환자로서 세상과 나눈 재활 운동의 성과였다.
첫 책은 그와 프란체스카 콜트레라의 공저였고, 두 번째 책은 그를 포함 4명의 공저였다. 공저자들은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 즉 전문필자였지만, 그는 표지에 모두의 이름이 대등하게 올라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위너(Winer)는 “동료 의사로서 캐럴린의 가장 인상 깊었던 면은 모든 환자는 의사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치료와 정성을 똑같이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환자가 유명 정치인의 부인이든 단골 식당 종업원의 사돈의 팔촌이든 똑같이 대했다. 만일 당신이 그의 환자가 된다면 당신은 그의 확장된 가족 구성원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남편 윌리엄은 의사로서의 그런 철학이 공저자에게도 공정한 대접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보스턴글로브, 2015.8.3)
유방암이 완치된 건 2005년이었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의 책을 들고 abc의 한 방송에 출연해 “병을 직접 앓아보니 의사로서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끼고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화학치료를 직접 받아 보고서야 환자들이 고통스럽게 하소연하던 ‘쇠맛’이 어떤 건지 알게 됐고, 만성피로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게 됐다는 거였다. 거울 앞에서 듬성듬성해진 머리나 눈썹도 속눈썹도 다 빠진 얼굴을, 밋밋해진 가슴을 바라볼 때 어떤 심정인지도. 자신이 그랬듯 “환자에게 그 혹독한 항암투병 과정을 이겨내게 하는 것은 가족과 친구, 이웃들의 따듯한 격려”라며, “하루빨리 병원에 돌아가 환자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도 말했다.(2005.2.17)
캘린은 다시 의사로 일하지 못했다. 일시적 수술 후유증으로 알던 손가락 감각 마비가 내도록 풀리지 않아서였다. 대신 그는 환자 및 가족 교육과 재활 훈련 프로그램 개발에 온 열정을 쏟았다. 운동과 식이요법 등을 가미한 YMCA 유방암 환자 재활프로그램을 만드는 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병원 내 ‘삶의 질 펀드’와 ‘지식과 힘과 품위’라 이름 단 일련의 유방암 교육 컨퍼런스를 조직했다. 사이클링을 하며 자주 들러 제2의 고향처럼 여기던 콜로라도 주 아스펜 시에서도 친구들과 함께‘삶의 질 암펀드(Quality of Life Cancer Fund)’를 만들어 매년 10만 달러씩 모인 기금으로 지역의 가난한 암 환자를 도왔다.(lehmanreen.com)
2010년 캘린은 타이핑이 제대로 안 돼 뇌 단층촬영을 받게 된다. 그는 뇌종양 중에서도 악성으로 알려진 교아세포종(glioblastoma) 진단을 받는다. 두 차례 뇌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면 걷기부터 시작되는 재활 치료를 받았다. 5년 남짓 투병하는 동안 그에겐 온갖 항암 신약들이 투여됐고, 그 중에는 임상실험 단계의 약도 있었다. 치료 후에는 약성 확인을 위한 검사들이 뒤따랐다. 그 말은 캘린이 특별한 환자여서 특별한 치료의 혜택을 받았다는 뜻도 되지만 그의 투병이 막바지까지 그만큼 험난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치료를 받는 환자인 동시에 항암 실험 대상자였다. 모든 치료는 물론 캘린의 동의 하에 이뤄졌다. 윌리엄스는 미 전역의 암 센터 연구진들이 “모자에서 토끼를 끄집어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그에게 매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기적을 바란 것도, 또 그 가능성에 가장 회의한 것도 어쩌면 그였을 것이다. 캘린이 숨진 뒤 남편 윌리엄은 “그가 받은 새로운 치료들이 캘린에게 정말 도움이 됐는지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했다.(뉴욕타임스) 마지막까지 캘린은 의연했다고 한다. 숨지기 일주일 전 병문안을 했던 첫 책의 공저자 콜트레라는 “캘린은 유방암 발병을 ‘아이러니’라고 말하더니, 뇌종양에 대해서는 그냥 ‘불운일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다”고 전했다.(워싱턴포스트, 15.8.3)
그녀의 친구였고, 주치의였고, 다나-파버 암연구소 유방암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에릭 위너(Eric Winer)는 “캘린은 열정적인 연구와 저술로 늘 주변에 영감을 주는 존재(inspirational figure)였다. 그를 잃은 건 환자와 연구소 동료들의 손실이고, 이 사회의 손실”이라고 말했다. 8월 28일 체스트넛힐 성 이그나시어스 교회에서 열린 그의 추도식 드레스코드는 당연하게도 ‘핑크’였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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