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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구월의 소소한 생각들

입력
2015.09.0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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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에게 반성문을 쓰다

구월. 가을…. 어느 날 문득, 이 동그란 말들을 중얼거려보면 계절은 나를 가난한 영혼의 집으로 데려다 놓는다. 여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커다란 감옥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계절이었다. 체에 걸려 나온 송사리 떼처럼 모두 자기의 육신을 파닥거리며 어디로든 뛰쳐나가야 살길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 삶을 지탱시켜주는 직장도, 매일 한 상에서 밥을 먹는 식구도, 같은 이불 속에서 일어나는 부부에게도 각자이고 싶은 본능의 시간이었다. 서랍을 어지르고 책상을 그대로 두고 집마저 비워놓고 우리는 뿔뿔이 그러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아, 그러나 그것도 없이 우린 무슨 재미로 일생의 모든 나루를 건너가겠는가. 이제는 돌아와 서랍을 정리하고 마른 걸레에 물을 적시고 다시 메고 나갈 가방을 챙기니 크게 달라지지 않고 기다려준 그 자리들이 고맙다.

구월. 가을…. 이 동그란 말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드니 하늘은 두고 온 바다를 덮어쓰고 파랗게 고요하다. 구름은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얗게 서로 뭉쳐 은색의 수채화를 그린다. 투명한 하늘어항을 유영하는 잠자리 떼가 아득하다. 아내가 가꾸는 마당의 작은 꽃밭에 봉숭아, 백일홍, 한련화가 피고 진다. 몇 개 달리지 않은 돌배나무를 감고 올라간 나팔꽃이 자주꽃을 활짝 피웠다. 귀뚜라미들이 몰려와 끊임없는 합창을 한다.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구월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귀뚜라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인생에 대해 그리고 또 살아온 날에 대해 반성문을 쓰고 싶어진다. 멋쩍다….

*개 이야기

소리는 13년 된 개다. 외래종인 코카 스파니엘과 그 비슷한 종의 믹스견이다. 곱슬한 견모에 얼굴에 흰털이 박히고 수염이 난 이 개는 여자로 태어나 한 번도 자식을 가져보지 못했다. 방에만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목사리를 없앴다. 모기창 밖에서 가끔 안을 들여다볼 뿐 조용하게 혼자 산다. 마루구석 양지쪽에 넙죽 엎드려 졸다 문을 열면 반기는 이 늙은 개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사이로 13년을 함께 살았다. 그 개가 지금 아프다. 물도 밥도 못 먹는다. 거실에 요를 깔고 눕혔다. 다가가면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해도 고개를 들 힘도 없다. 두 손으로 얼굴을 받쳐 들고 눈을 마주친다. …아프냐. 너를 보는 나도 쓸쓸하다. 지금 너는 이 생에 태어난 목숨 값을 혼자 감당하는 중이다. 개의 눈에 눈물이 비친다.

창문을 열어놓자 개는 혼신의 힘으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한낮의 햇빛이 쏟아지는 먼 산을 바라본다. 비척비척 마루를 내려간다. 꽃밭에서 잠시 쉬어 멍하니 바라본다. 갑자기 늙은 인디언 추장의 “오늘은 내가 조상의 나라로 가기 좋은 날”이란 말이 떠오른다. 마당의 물가로 가는 모양이다. 거기가 한참이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개를 끌어안는다. ‘백혈구 수치 감소. 폐혈증. 자궁축농증’. 소리는 지금 수술대 위에 있다. 늘 그렇듯 의사는 반반이란다. 우리 삶에 반반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다만 저쪽 반이 아니라 이쪽의 반이기를 바란다.

*가을 산책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후지와라 신야’ 그리고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에 위로를 받으며 볕 좋은 가을의 몇 날을 건너는 중이다. 책을 읽으면 가끔 그것을 쓴 사람을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얼마나 열심히 죽어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태어났던가. 불빛을 둘러싸고 빙빙 도는 하루살이 떼는 줄어들지 않는다. 타 죽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목숨들에게 날개란 무엇인가…. 삶이 한없이, 황홀해 보인다.’ 이윤학 시인의 ‘하루살이’라는 시다.

만리산 능선 길을 산책한다. 얼마 전 예초기로 베어버린 길가에 살아남은 풀들이 꽃을 피웠다. 마타리. 달맞이꽃. 강아지풀. 억새의 수술이 올라와 희게 퍼질 준비를 한다. 가을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계절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쓸쓸하게 아름다운 계절이다.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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