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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호찌민(胡志明)의 한국인 동창생들

입력
2015.09.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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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 도개손 평전’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김찬은 1925년 4월 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창립된 제1차 조선공산당의 선전부장 김찬과는 동명이인이다. 김찬의 부인 도개손은 북경대 최초의 여성 이과대학생이자 명가 후손의 중국인인데, 중국청년들 대신 식민지 청년을 반려자로 삼은 것이 눈길을 끈다. 필자가 김찬의 일생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의 일생과 닮은꼴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성작가 님 웨일즈는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연안(延安)에서 김산을 만나 ‘아리랑’을 썼다. 김산은 역정에 가득 찼던 자신의 일생을 설명한 후 더욱 열심히 혁명운동에 매진하고 싶다는 견해를 밝혔다. 필자는 님 웨일즈와 헤어진 이후의 김산의 삶이 궁금했다. 김산이 제 발로 찾아간 연안에서 일제의 간첩 혐의로 사형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꽤 놀랐다. 그런데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주인공 김찬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김찬이 더 비극적인 것은 부부가 함께 사형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형시킨 인물은 중국공산당 중앙사회부의 강생(康生)이었다. 중공 중앙사회부는 중공 중앙정보부로서 ‘중공중앙 적구(敵區)공작위원회’라고도 불렸다. 강생(康生)은 모택동(毛澤東)의 이른바 연안정풍(延安整風) 운동에 편승해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수많은 사람들을 첩자나 반당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그래서 연안에 ‘홍색(紅色) 공포’라 불렸던 숙청이 만발했다. 중국국민당에는 대립(戴笠)이 이끌었던 군통(軍統)이라는 정보기관에서 공산주의자 색출과 숙청을 주도했다.

그나마 대립의 군통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주로 제거했다면 강생의 중앙사회부는 국민당의 첩자나 반당분자라는 명목으로 김산이나 김찬처럼 평생을 혁명운동에 바쳤던 인물들을 대거 제거했다. 김산과 김찬ㆍ도개손 부부의 최후가 더 비극적인 것은 제 발로 연안을 찾아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당의 대립은 1946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지만 중국공산당의 도살자 강생은 1975년 사망 당시 중공 중앙정치국위원이자 부주석으로 승승장구했다. 사망 당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 왕홍문(王洪文)의 뒤를 이은 중국 서열 4위였다.

김산과 김찬이 왜 제 발로 연안을 찾아가 강생 같은 도살자의 손에 목숨을 맡겨야 했을까? 박헌영이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시절 남녀 동기생 열여덟 명과 찍은 사진이 있다.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 평생동지였던 김단야가 있고, 올 봄에 출간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의 주인공 현앨리스도 있다. 이 사진에서 박헌영과 함께 눈길을 끄는 인물은 제일 뒷줄의 베트남 혁명가 호치민(胡志明ㆍ1890~1969)이다. 호치민과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 동기생이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과 달리 호치민은 승리했고,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 받고 있다. 필자는 호치민이 성공한 이유를 베트남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사고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호치민은 1930년 영국의 식민지 홍콩에서 월남공산당을 조직했다가 1940년 일제가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하자 연합전선인 월남독립동맹회를 결성해서 그 주석으로 베트남 남부를 차지한 프랑스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사진의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임원근, 박헌영과 함께 초기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삼총사로 불렸던 김단야는 1934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되었으나 1937년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의 간첩 혐의였는데 1938년 제 발로 찾아간 소련에서 사형 당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총비서가 되었던 박헌영은 6·25 와중인 1952년 미국의 간첩 혐의로 조선노동당에서 숙청당하고, 1956년 7월 미제의 간첩이란 혐의로 처형되었다. 현앨리스 역시 같은 해 평양에서 처형당했다.

호치민은 우리가 월맹(越盟), 또는 북월(北越)이라고 불렀던 월남민주공화국 주석으로 있던 1969년 9월 2일 세상을 떠나 그제 46주년 추모식이 치러졌다. 김일성이 정적에 대한 가혹한 숙청과 극도의 공포통치로 신격화된 반면 호치민은 사망 당시 옷 몇 벌과 지팡이,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 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고, 지금도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여긴다. 호치민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는 이야기의 진위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호치민의 부친 응우옌 신삭(阮生色)이 한의사였던 것처럼 호치민도 한문을 읽을 수는 있었다. 호치민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은 왜 한결같이 비극적 운명에 처해야 했을까? 한국 사회의 보수화 경향을 우려하는 진보 계열 인사들이 깊게 고민해야 할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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