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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길 위의 이야기] 가을 우체통

입력
2015.09.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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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모르고 있었는데, 한 블록 옆 거리에 우체통이 있다. 가늘고 짧은 다리에 머리통과 몸통 구분이 없는, 새빨갛고 귀여운 몰골.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 봐도 첫 만남이다. 만날 지나다니는 길인데 왜 못 보고 지나쳤을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다. 손이라도 있으면 뜨겁게 악수라도 나누고 싶다. 저 옆 횟집에서 전어에 소주라도 한잔 할까, 꼬드기고도 싶다. 그래도 우체통은 우체통답게 입귀만 벌린 채 묵묵부답. 우체통이 언제 자기 말 할 때가 있던가. 우체통은 그저 남의 말을 받아 간직하고 있다가 다른 이에게 전달만 할 뿐이다. 그게 믿음직스럽다. 배구로 치면 서브나 공격은 가담 안 하고 오로지 토스만 올리는, 다른 선수완 유니폼 색마저 구분되는 리베로와 같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그 어느 편의 감정에도 관여하지 않은 채 늘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초병처럼 총을 들고 위압감을 주거나 술집 앞의 호객꾼처럼 수다스럽지도 않다. 전혀 없는 듯 서 있다가 필요할 때만 빨갛게 모습을 드러낸다. 몇 년 전, 주운 지갑을 돌려주려고 어느 낯선 길에서 조우한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참에 손 편지나 한 통 써볼까. 문득 김민기 노래가 떠오른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물론, 그대가 누구여도 상관없다. 우체통에게도 나에게도. 아, 가을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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