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장 “10명에게 5억 뇌물” 메모를 증거 제시했다가
“대여금도 있다” “안 준 돈도 있다” 진술 계속 바꿔
35년 ‘메모광’ 시의원 반박 증거는 모두 배척
검찰과 법원은 과연 공정한 심판자 역할을 했는지...
2013년 8월 검찰은 부실회계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바이오업체에서 뇌물 5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금융감독원 간부를 구속했다가 열흘 만에 풀어줬다. 돈을 전달해주기로 한 전직 국회의원은 배달사고를 내고도 검찰 조사에선 그 돈을 금감원 간부에게 전달했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검찰은 전직 의원의 진술을 근거로 금감원 간부를 체포했고 법원은 영장까지 발부했다.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할 범죄자로 낙인 찍혔던 금감원 간부는 뒤늦게 전직 의원이 진실을 털어놓으면서 누명을 벗었다. 당시 이 사건을 지켜본 법조계 인사는 “검찰과 법원이 모두 전직 의원의 거짓말에 놀아났으니 거짓말이 계속 이어졌으면 금감원 간부는 지금도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상대방이 나쁜 마음을 먹고 거짓말을 하면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철창생활을 지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뇌물수수 혐의를 받았던 백의종 씨 공소장에는 재건축 조합장 유씨가 백씨에게 2005년 7월15일 현금 4,000만원을 건넸다는 내용이 핵심인데 대법원에서 유죄로 인정했다. 증거로는 공여자인 유씨의 진술과 유씨가 임의로 작성했다는 메모뿐이다. 백씨의 금품수수 혐의를 뒷받침할 자금출처 및 사용처 등 구체적인 금융자료도, 증인도 없었다. 유씨가 뇌물을 보관했다고 지목한 창고는 실제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하고, 두 사람 사이에 돈이 오간 내역도 없었다. 법원은 그럼에도 유씨 진술에 일관성이 있다는 이유로 유죄를 인정했다. 그런데 4,000만원을 줬다는 주장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었다.
유씨는 2010년 11월15일 검찰에서 자신이 작성했다는 메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내가 백의종에 대해서만 적아 놓았다면 몰라도 그 메모지에 여러 명의 이름(사람 이름 중 한 글자 또는 두 글자만)과 그 옆에 내가 준 금액들이 적혀 있다. 실제 내가 그 금액들을 그 사람들에게 줬다.” 유씨가 손으로 직접 썼다는 메모에는 암호처럼 ‘7/16 한송 30ㆍ30, 7/18 홍종 30, 박지 100, 박병 120, 박상 70, 정형 15, 7/15 신봉 10ㆍ4, 김순 10, 백 40, 이충 40’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씨는 날짜와 이름, 금액(백 만원 단위는 생략했다고 주장)을 순서대로 기재했다고 했다.
유씨에 따르면 ‘7/16 한송 30ㆍ30’은 2005년 7월16일 한모씨에게 3,000만원씩 두 번 줬다는 의미이고, ‘7/18 홍종 30’은 2005년 7월18일 홍모씨에게 3,000만원을 줬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백 40’은 2005년 7월15일 백의종 씨에게 4,000만원을 줬다는 게 유씨의 주장이었다. 메모를 전체적으로 해석하면 유씨는 2005년 7월15일부터 7월18일까지 나흘 동안 무려 10명에게 4억9,900만원을 뇌물로 건넸다는 뜻이 된다. 검찰에 따르면 이 메모는 수감 중이었던 유씨가 친동생을 시켜 조합사무실에 보관 중인 트렁크를 검찰로 가져와 살펴보던 중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재건축 조합장 유씨는 백의종 씨의 1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선 말을 바꾼다. 메모에 적힌 돈의 총액인 4억9,900만원이 모두 뇌물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백40’은 백의종 씨에게 뇌물로 4,000만원을 전달한 게 분명하다고 진술한다.
변호인 : (메모에) ‘7/16 한송 30ㆍ30’이라고 기재한 것은 ‘한송’이란 사람에게 6,000만원을 준 것인가요.
유씨 : 맞습니다. 그런 부분은 다 확인이 되었습니다. 증인과 채권채무가 끝난 사람들입니다.
변호인 : 증인은 7월15일부터 7월18일까지 4억9,900만원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 현금을 메모에 적혀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로 전달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유씨 : 전부 다 뇌물은 아니고, 현금으로 가지고 있던 것은 맞습니다.
변호인 : 위 메모 중에 어떤 것이 뇌물인가요.
유씨 : 그것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변호인 : 전체가 뇌물은 아니지만 ‘백40’은 뇌물이라는 건가요.
유씨 : 예
유씨는 백의종 씨의 항소심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선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1심 때와는 달리 메모에 적힌 돈을 모두 전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급한 돈도 일부는 뇌물이고 일부는 대여금이라고 밝히는 등 오락가락한다. 현금뿐만 아니라 수표도 포함돼 있다고도 말한다.
변호인 : 4억9,900만원을 전부 현금으로 제공한 것 아닌가요.
유씨 : 전부 현금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전달도 하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변호인 ; 전달조차 하지 않은 금액까지 메모에 기재해 놓았다는 것인가요.
유씨 : 예
변호인 : 메모에 기재된 돈 중 일부는 뇌물이고, 일부는 대여금이고, 일부는 지급되지 않았다는 건가요.
유씨 : 예
변호인 : 대여금인데 일부러 이를 현금으로 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씨 : 현금도 있고 수표도 있습니다.
주심판사 : (메모대로라면) ‘한송’과 ‘신봉’에 대해 돈을 지불했나요.
유씨 :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판사 : 증인은 수사기관에서는 두 번에 걸쳐서 ‘한송’에게 돈을 지급했다고 진술했지요?
유씨 : 예. 그래서 ‘한송’이 증인과 대질신문 해서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되었습니다.
판사 : 왜 수사기관에서 ‘한송’에게 돈을 지급한 것으로 진술했나요.
유씨 : 지급할 계획이었는데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판사 : 당시 기억을 잘못해서 잘못 진술했다는 건가요?
유씨 : 예
이처럼 질문에 따라 답변이 오락가락하는데, 재건축 조합장 유씨가 작성했다는 메모는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유씨는 앞서 경찰관에게 뇌물을 건넨 사건에서 증거자료로 금품공여 내역이 적힌 수첩을 제시했지만 법원에서 신빙성이 없다며 인정받지 못한 적이 있다. 법원은 “유씨가 돈을 건넸다는 금융거래 내역이 전혀 없고 수첩 기재내용이 사후에 일괄적으로 기재된 것으로 충분히 의심돼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백의종 씨의 일기를 보자. 그는 ‘메모광’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이 익숙하지 못한 그는 시의원에 당선된 1991년부터 현재까지 35년 가까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손으로 일기를 써왔다. 수감 중에도 썼고 해외에 있을 때도 썼다. 물론 그가 써온 일기가 전부 진실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35년 동안이나 써온 자신의 일기를 일부러 거짓으로 기록했을 이유도 없어 보인다.
백의종 씨가 자신의 서울 마포구 아현동 사무실을 찾아온 유씨로부터 현금 4,000만원을 받았다는 2005년 7월15일 일기장(사진)이다.
당시 서울시의원이던 백씨가 초복을 맞이해 운전기사와 함께 마포구 관내 5개 동과 공덕시장,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들른 것으로 기재돼 있을 뿐 사무실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백씨를 수행했던 운전기사도 당일 백씨가 사무실에 들른 적이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그러나 백씨가 외부활동 중에 잠시 사무실에 들러 돈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운전기사의 주장은 오래된 일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며 배척했다. 오락가락하고 수시로 바뀐 유씨 주장은 인정하고, 시종일관 돈을 받지 않았다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한 백씨 주장은 ‘아닌 것 같다’며 무시한 셈이다.
백의종 씨는 검찰에 체포된 2010년 11월3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금 4,000만원은 금시초문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수사관은 부인한다고 몰아붙인다. 유씨가 뭘 얻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적었다. 실제로 검찰 수사관은 당시 혐의를 부인하는 백씨에게 “당신 그런다고 빠져나갈 것 같나. 두고 보자”며 윽박질렀다고 한다. 백씨는 검찰이 증거도 없이 받지도 않은 돈을 받았다고 몰아붙여 당연히 무죄가 나올 줄 알고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옥중에서 작성한 백씨의 일기장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 밝혀진다.’ 현금으로 오간 4,000만원에 관한 진실은 백씨와 유씨 두 사람만 정확히 알겠지만 검찰과 법원이 어느 정도 공정한 심판 역할을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과연 무엇이 진실 일까.
강철원기자 strong@hankookilbo.com
*’뇌물수수 시의원, 그는 사법 피해자인가’ 시리즈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제보가 이어지고 있어 추후 번외(番外) 취재기를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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