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아침 출근길에 서울역 광장을 지나는데 구역사 앞 강우규(姜宇奎) 의사 동상 주위에 화환이 세워져 있다. 행사 준비하는 이에게 물으니 ‘강우규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이라고 쓰인 화환 리본을 가리킨다. 강 의사가 서울역 광장에서 새로 부임하는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향해 폭탄을 던진 게 96년 전 바로 이날(1919년 9월2일)이었다. 빗나가 일본인 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고 사이토 암살은 실패했다. 그러나 세계 만방은 물론 일제식민통치자들에게 우리민족의 독립의지와 열망을 알리는 데는 충분했다.
▦ 의거 후 16일 만에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붙잡힌 강 의사는 이듬해 사형언도를 받고 11월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나이 65세, 환갑을 훌쩍 넘었다. 요즘으로 치면 최소 80노인이다. 그 연세에 직접 폭탄 투척에 나선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상 유일무이하다. 강 의사는 사형 확정 후 옥바라지 하던 이들이 슬퍼하자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라며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 3ㆍ1운동에 이은 강 의사의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많은 비밀결사가 결성되고,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해졌다. 최근 영화‘암살’로 주목을 받은 김원봉의 의열단도 그때 만들어졌다. 1855년 7월 평남 덕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강 의사는 연해주, 만주로 건너가 광동학교 등을 세워 청소년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 섰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지부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 강 의사 동상을 지나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지인이 보낸 글이 휴대폰에 떴다. 8월31일 102세로 별세한 강석규 전 호서대총장이 95세 생일에 썼다는 수기다.“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라는 대목에서 65란 숫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고인은 65세에 은퇴한 뒤 30년의 인생을 준비 없이 보낸 것을 가슴 아파했다. 나라독립을 위해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바칠 수 있고, 향후 30~40년을 더 살아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65세란 나이가 새삼스럽게 다가온 날이었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wk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