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군 포로 5만명 중 25% 사망…하루 쌀 한컵 연명 영양실조 걸려
인니 수백개 수용소에 서양인 10만… 소녀들 칼로 위협해 위안부 끌고가
“이곳에서 열대궤양으로 피부가 썩어 다리 뼈를 드러낸 채 일하는 수용자를 마주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태국 충카이 포로수용소에서, ME 바렛)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은 올 들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특히 일본이 운영하는 포로 및 강제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이들의 생생한 증언은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던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아시아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등 서방국 국민 수십만명 역시 태국이나 중국 등지의 수용소에 끌려가 고역을 치렀다. 이들은 전염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노역에 동원되는가 하면, 10살도 채 안 된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각종 공포를 견뎌내야 했다.
매일 쌀 한 컵으로 버틴 영국 포로들
2차 대전 당시 일본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영국 병사는 5만여명에 달한다. 이 중 4분의 1은 각종 학대와 질병으로 수용소 안에서 목숨을 잃었고, 3만2,500여명만이 종전 후 자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국 남서부 도싯 출신 밥 허클스비(94)씨는 운 좋게도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 종전의 기쁨을 맛본 이들 중 하나다. 그러나 그는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대신 매일을 전쟁의 기억으로 아파했고, 여전히 스러져간 동료들을 기억할 때면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BBC에 밝혔다. 충카이 수용소에 갇혔던 밥씨의 증언에 따르면 태국 등 다수 포로수용소에서 3, 4년간의 시간을 보냈던 영국 병사들은 상상 이상의 참혹한 나날을 마주해야 했다. 밥씨는 “3년 반 동안 한 컵도 안 되는 쌀을 배급 받아 하루를 버텼다”며 “영양실조로 인해 시력 및 신경이 손상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밥씨는 하루 한 번 배급되는 한 끼 식사마저도 더럽기 짝이 없어 당시 수용소 내 영국 병사들은 말리리아와 이질 같은 병을 달고 살아야 했다고 덧붙였다.
이질을 앓는 밥씨의 동료들은 뼈만 남았을 정도로 말랐고, 노역에 동원되지 못하는 쓸모 없는 짐짝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한 차례 수용소를 할퀴고 간 ‘열대궤양’이라는 끔찍한 병은 전승 후엔 건강하게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병사들의 실낱 같은 희망까지 무너뜨렸다. 충카이 수용소의 궤양 치료소에서 일하던 육군 중위 ME 바렛씨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정글에서 일하다 대나무에 찔려 난 상처 때문에 다리와 팔 등에 궤양이 난 열대궤양 환자들이 속출했다. 궤양은 성인 남성 발 크기만 했고 폭은 3㎝에 육박했다. 궤양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 때문에 다리 뼈를 다 드러내놓고 다니는 이들을 목격하는 것은 이곳에선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군은 최소한의 저항도 용납하지 않았다. 태국 칸부리의 장교 사무소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빌 드로워 중위는 그를 수용소에 데려 간 일본군에게 말대꾸를 했다 폭행을 당했다고 BBC에 증언했다. 그는 온 몸에 든 멍과 골절상을 치료하지도 못한 채 90일 동안 독방에 감금됐다. 일본의 항복으로 겨우 구출된 드로워 중위는 당시 말라리아 합병증인 영상실조와 흑수열로 거의 실신상태였다.
극한 상황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은 3,4명씩 짝을 지어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했다. 배급 받은 음식을 나눠 먹었고 혹여 아픈 동료가 있을 때는 대신 일 해주기도 했다. 입대 전 배관공 일을 했었던 프레드 마가슨씨는 충카이에 비밀 작업장을 만들어 궤양으로 다리를 잃은 동료들을 위해 직접 의족을 만들었다. 당시 공군 이등병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붙잡혀 있던 데렉 포가티는 “우리는 형제처럼 의지했고, 아플 땐 같이 아프고 죽을 땐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살았다”고 말했다.
수용소서 달걀껍질 먹고 자란 미국 소녀
전쟁의 고통은 비단 어른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지난달 17일 BBC가 소개한 미국 여성 메리 프리빗은 2차 대전 발발한 그 해 부모와 떨어져 3년 간 중국의 강제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당시 그의 나이 8살이었다.
전쟁 발발 전 메리씨는 기독교 선교사이자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시에서 성경학교를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일본이 처음 중국을 침공했을 때 일본군은 서양인 대부분을 그대로 카이펑에 남겨뒀고, 메리씨의 부모 역시 남겨진 이들을 돌보기 위해 카이펑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부모는 그러나 자식들에게까지 그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부는 메리씨 등 4남매를 산둥성 취푸(曲阜)에 위치한 외국인 학교에 보낸다. 하지만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메리씨와 그의 가족은 한 순간 일본의 적이 됐다. 일본군은 취푸로 진격해왔고 메리씨 남매가 다니던 학교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외국인 학교를 곧장 교도소로 탈바꿈시켰고, 이를 다시 군사기지로 개조하기까지 1년 동안 아이들과 서양인들을 이곳에 가둬뒀다. 이후 1,500여명의 수용자들은 웨이센(威縣) 수용소로 옮겨져 더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교사들은 공포에 떠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게임으로 활용했다. 쥐잡기 놀이, 파리와 빈대 잡기 놀이는 수용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 방식이었다. 수용소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가장 많은 쥐와 벌레를 잡아오는 승자에게는 작은 선물도 주어졌다. 메리씨는 “선생님의 이러한 행동이 당시에는 얼마나 아이들을 안심시켰는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사망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불안을 키워야 했다. 메리씨에 따르면 자신이 목격한 숨진 이들 가운데는 영국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 에릭 리들도 있었다. 어른들은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해 암시장에서 달걀을 얻어와 그 껍질을 먹였다. 칼슘 보충을 위해서였다. 메리씨는 “그 때 먹은 달걀 껍질의 맛은 정말 불쾌해 아직도 잊을 수 없다”며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았지만 나와 친구들은 모두 살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삼켰다”고 했다.
위안부 참상 목격한 네덜란드 여성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일본 강제수용소에서 4년을 보낸 네덜란드 여성 베르테 코비누스(77)씨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던 소녀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지난달 10일 신화통신에 털어놨다.
베르테씨는 1938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였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로부터 4년도 얼마 지나지 않은 1942년 3월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그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베르테씨는 “선교사였던 아버지는 반둥 지역의 포로수용소로, 나와 어머니 그리고 자매 둘은 문틸란에 있는 여성 및 어린이 전용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했다.
네덜란드 국립도서관 산하 역사기록 기구 ‘네덜란드의 기억’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꾸린 수백개 수용소에는 10만명 가까운 서양인들이 갇혀 생활했다. 성인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아이들은 노역에 나간 부모 없이 기아와 두려움을 홀로 버텨내야 했다. 베르테씨는 “어린 아이들이 잘못하면 어머니가 대신 두들겨 맞아야 했고, 이를 지켜보는 것은 너무 혹독했다”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매 시간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환경 속에서 버텨야 했다”고 말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지 반세기 넘게 지났지만 베르테씨는 그 때의 생활이 점점 더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1944년 1월 어느 날 일본군이 같은 방에 있던 14, 15살 난 소녀 15명을 강제로 끌고 갔다”며 “소녀들이 저항하면 일본인들은 사무라이 칼로 위협했다”고 전했다. 베르테씨는 “당시에는 너무 어려 잘 몰랐지만 이들이 위안부로 끌려간 것이 확실하다”며 침대 아래 숨어 숨죽여야 했던 그 때를 떠올렸다. 그는“‘위안부’ 역할을 하던 한국과 필리핀 여성들의 고백과 토로를 생생히 기억한다”며 “그들은 고통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냈다”고 덧붙였다.
일본 규탄 곳곳서 수십년 째 이어져
해가 갈수록 몸과 마음에 남은 전쟁의 상흔은 뚜렷해지지만, 이들은 과거에만 머무는 대신 일본이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 하도록 촉구하는 등 각종 활동에 나서고 있다.
종전 후 일본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영국 병사 다수는 단체를 꾸려 매년 회의를 열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전후 문제들에 대해 적극 토론하는 중이다. BBC에 따르면 이들은 최근 각종 활동으로 모은 돈으로 수용소에서 얻은 병으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의 치료를 돕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노역에 참여했던 론다 벨리 광부들은 전쟁 후 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125만파운드(약 22억5,000만원)을 동료들과 나눌 생각이다.
메리씨는 1997년부터 수용소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어른과 친구들을 찾아 전후 사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베르테씨 등 관련자들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1994년 12월부터 ‘화요집회’를 열고 있다.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여는 ‘수요집회’와 비슷한 형식이다. 네덜란드 역사가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네덜란드 여성을 250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규탄하는 데 집회의 방점이 찍혀 있다. 베르테씨는 또 자신이 직접 겪고 목격했던 일본 수용소 내 참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자서전을 집필하는 중이다. 베르테씨는 “역사를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세계인들이 알아야 할 역사의 일부분이고 이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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