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0년 전 해방 정국. 해방 후 두 달도 되지 않은 극도의 혼란기임에도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당의 숫자는 54개에 이르렀다 한다. 그 후 1년 만에 300여개로 늘어나 정파와 이념의 빅뱅현상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가장 좌쪽에는 박헌영에 의해 주도된 공산당(후에 남로당), 그로부터 오른쪽으로 여운형이 이끄는 중도좌파의 조선인민당(후에 근로인민당), 다시 오른쪽으로 김구 선생 등 상해임시정부 계열의 한독당, 그리고 더 오른쪽에는 우파민족진영의 집산인 한국민주당(일명 한민당)이 존재했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 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위의 글은 1945년 9월 15일 창당한 보수원조 한민당 강령의 일부이다. 이 당의 주요 정책은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교육 및 보건의 기회 균등,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분배 등이었다. 가히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후 한민당과 갈라선 이승만은 독재의 정치기반으로서 1951년 12월 한국전쟁 중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지주, 상공인, 지식인 등의 기득권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한민당과는 달리 이승만의 추종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잃은 것이 없어 노동자와 농민을 그 기반으로 포섭하기 위해 노농당(勞農黨)이란 당명까지 고려했다 한다.
그래서일까? 당시 자유당은 “독점경제 패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물리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 기업가 및 기술 있는 자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을 강령으로 천명했고, “노동자, 농민 등은 자유당 깃발 아래로 단결하자. 그리하여 싸우자”고 선언했다. 또한 같은 보수세력이지만 야당인 민주당도 “참된 반공민주 낙원의 건설을 위하여”, “노동자의 권익 향상과 사회보장제도의 창설”하자는 공약을 내놓기도 하여 당시 보수 진영 모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숭배자인 이주영 교수의 주장이다(월간 ‘시대정신’ 2010년 여름호). 사회민주주의 또는 복지국가라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민중의 삶을 위해 반공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진보적인 경제ㆍ사회정책을 당연시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재 정치권을 포함하여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는 복지국가에 대한 담론은 70년 전의 역사를 복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전혀 새로울 것도 없다. 다만 독재자들이 반공을 앞세워 진보 정당의 싹을 자르고, 이념 대립과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아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불온시하고 분배 정의와 자본의 사회적 통제라는 정책 수단을 백안시한 결과 그 이념적, 정책적 전통이 거의 단절된 복지국가 역사의 암흑기가 뼈아플 뿐이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 많은 이들이 그린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 현재 시점에서 복지국가로 대변되는 우리의 바람과 다르지 않았음은 역사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분명 그 세월 동안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용기와 지혜가 세계민이 찬탄하고 부러워할 정도의 민주화와 경제적 성과를 만들어 냈다. 또한 소득과 소비 수준의 향유 정도는 상전벽해라 해도 모자랄 정도의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세계 최장노동시간과 최고의 산업재해율, 높은 노동강도를 대가로 확보된 것이며, 그나마도 아직 주거, 의료, 교육, 양육, 노후, 고용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양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각자도생의 처세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피폐함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세계 최고의 자살률로 고스란히 나타난다.
복지국가의 프리즘으로 광복 70주년을 바라보면, 이제야 뒷걸음치던 길을 거슬러 와서 겨우 다시 원점에 서있음을 깨닫게 된다.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이미 닻은 올랐고 돛은 나부끼며 노 젓는 이들의 숨결은 거세다.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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