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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세 친구의 책 선물 나눔… 이젠 커다란 독서모임 됐죠"

입력
2015.09.0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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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우연히 만나 매달 읽고 토론

현재 회원 50명… 소모임도 활발

해마다 저자 초청 인문학 축제까지

"독서 공동체 참여는 행운의 무지개"

‘책 익는 마을’ 회원들이 회비를 모으고 저자를 초청해 매년 열고 있는 보령 인문학 축제의 올해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독서 토론을 하고 있다. ‘책 익는 마을’ 제공
‘책 익는 마을’ 회원들이 회비를 모으고 저자를 초청해 매년 열고 있는 보령 인문학 축제의 올해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독서 토론을 하고 있다. ‘책 익는 마을’ 제공

프랑스의 소설가 아나이 닌이 말했다. “친구들은 각각 우리 내면에 있는 하나의 세계를 대변한다. 그들이 우리 삶에 도달할 때까지는 태어날 수 없었던 세계들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만남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계가 태어난다.” 과연 친구란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홀로에서 둘이 되는 순간, 두 사람을 둘러싼 세상은 근본적으로 변혁된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이 불현듯 도래한다.

수줍은 책 선물에서 시작된 운명

세 사람이 있었다. 시쳇말로 ‘절친’이었다. 그 중 하나가 책을 읽다 친구들한테 선물하고 싶어졌다. 배기찬의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위즈덤하우스)였다. 친구들로서는 어른이 되어서 거의 처음 받는 책 선물이었다. 성의가 고마워서, 각자 읽고 나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약속했기에 모두 꾸준하게 짬을 내어 두툼한 책을 모두 읽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학창 시절 이후, 다른 사람과 책을 놓고 토론한 것도 처음이었다. 왠지 모를 설렘으로 가슴이 계속 두근댔다. 만남의 기대만으로 한 달이 충만한, 기이한 경험이었다. 책을 가운데 놓고 꿈같은 토론이 끝날 무렵 ‘한 달의 행복’을 선물 받은 친구 중 한 사람이 수줍게 또 다른 책을 친구들한테 선물했다.

2006년 여름의 일이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처음 한 번은 우연에 지나지 않지만, 반복되면 어떤 운명을 이룩한다. 다음 달에도, 그 다음 달에도 친구들 사이에서 책 선물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사이 몇 차례 풍파를 겪었지만, 지금까지 한 차례도 쉬지 않았다. 책을 통한 세 사람의 나눔이 깊어지면서 알음알음 지인들이 그들 곁으로 모여들었다. 세 친구를 디딤돌 삼아 모임이 조금씩 커지더니 결국 국내 최대의 자발적 독서공동체 중 하나인 ‘책 익는 마을’이 생겨났다.

우정이 낳은 힘 덕분인지, ‘책 익는 마을’은 현재 활동회원만 50명에 가깝다. 모임을 거친 사람을 모두 합치면 130명 가량이나 된다. 회원의 자원봉사로 운영하는 청소년 독서모임 회원도 중학생과 고등학생 각각 두 모둠씩을 이루어 스무 명 넘게 별도로 있다. 활동도 무척 다채롭다. 인문학 축제도 한 해에 한 번씩 개최하고, 저자 초청 토론회도 분기별로 열린다. 이 행사들은 비회원도 참석할 수 있다. 겨자씨 만한 책 선물이 지상에 떨어져 어느새 거대한 뿌리를 뻗은 셈이다. 첫 번째 책 선물 증여자로 보령에서 내과 병원을 운영하는 원진오 원장이 입을 열었다.

“셋이서 거의 한 해 넘게 모였습니다. 매달 한 번씩 책을 읽고 모여서 토론하고, 책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 나누다 보니 사는 즐거움이 커져갔습니다. 게다가 내가 읽고 싶은 책만 읽는 ‘독서 편식’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친구들 정성이 담긴 선물이니까 취향이 나랑 다른 책이라도 존중해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지인들한테 입소문이 나면서 모임이 조금씩 불어났습니다.”

저자 초청 인문학 축제도 열어

‘책 익는 마을’의 ‘익다’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물론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한자 익(益)이다. ‘더하다, 이롭다, 유익하다’는 뜻의 이 말로써 시간이 흐를수록 모임이 실하기를 기원했다. 마지막으로는 술이 아랫목에서 익어가는 것처럼 책과 토론을 통해 회원 각자가 ‘성장한다’는 마음을 담았다. 벌써 아홉 해째, 모임에 끼어들어 보니 무르익어 맛있는 냄새가 넘쳐난다.

여름의 보령은 ‘머드’로 유명하다. 대천 앞바다 근처가 온몸에 검은 흙을 바른 이들로 떠들썩하다. 회를 친 생선은 살집이 올라 고소하고, 소라나 조개 등도 무척 풍성해 인심이 후하다. 거기에 2010년 이래 벌써 여섯 해째, ‘책 익는 마을’에서 회비를 모은 후 저자를 초청해서 열리는 ‘보령 인문학 축제’가 있어 더 풍요롭다. 별도의 외부 지원 없이 오직 자력으로 치르는 행사다. 올해는 ‘공자, 제자들에게 정치를 묻다’(김성희 지음, 프로네시스)를 읽고 모여서 숭실대 오상현 외래교수의 진행으로 함께 여러 문제를 토론했다.

인문학 축제가 열리는 보령 문화의 전당에 이르자, 이미 서른 명 넘는 회원들이 모여 토론이 뜨겁다. 오 교수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연신 쏟아낸다.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하는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나쁜 것인가?” “공부는 왜 해야 하는가?” 등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곳곳에서 손이 올라가고, 대답을 주고받으면서 치열하게 논전이 펼쳐진다. 곁가지를 자르고 밑줄기를 북돋우면서 이야기꽃을 피워내는 오 교수의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문제마다 토론 결과를 정리해 매조지는 덕분에 인문학이 친근하다.

“맹자는 ‘하필왈리(何必曰利, 하필이면 이익을 이야기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성실하게 일한 백성들이 재산을 불려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왕과 같은 지도자들이 이익을 좇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왕이 이(利)를 좇으면 온 나라가 이(利)를 좇고, 왕이 의(義)를 좇으면 온 나라가 의(義)를 좇습니다. 왕이 의를 좇으면 백성들이 마음껏 이를 추구해도 의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맹자는 이 사실을 환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왕은 오직 의를 좇아야 합니다.”

심층 토론 위해 소모임으로 운영

어떤 독서공동체도 모임이 커지면 필연적으로 고민이 생긴다. 마흔 명 이상이 같은 자리에 모여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밀도가 아주 떨어진다. 깊은 토론이 줄어들면서, 어쩔 수 없이 책보다 친목으로 모임을 이어가기 십상이다. 이렇게 근본과 말단이 전도되면 서서히 책 읽기는 흐지부지된다. 규모가 토론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자, 회원들은 여덟 명씩 소모임으로 나누어 책을 읽기로 했다. 자연스레 친구들도 서로 다른 모둠으로 떨어졌다. 소모임 날짜는 매달 둘째 주 화요일을 권장하지만, 소모임 별 사정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물론 책 선물 전통은 소모임에서도 여전히 이어가는 중이다. 현재 촌장을 맡고 있는 문석주씨가 이야기를 꺼냈다.

“소모임은 철저히 토론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준회원으로 3회 이상 참여해야 정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정회원이 된 순서대로 발제를 하는데, 발제자는 자신이 읽은, 또는 읽고 싶은 책을 정해서 나머지 회원한테 선물합니다. 이렇듯 책 선물은 ‘책 익는 마을’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임 형태가 아주 독특하다. 회원들끼리 서로 친목을 나누는 것보다 책을 통해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합의 아래, 소모임 회원을 두 해에 한 차례씩 무작위로 교체해서 뒤섞는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깊고 치열한 대화를 활성화하겠다는 생각이다. 문 촌장이 말을 잇는다.

“발제자가 읽자고 한 책은 무조건 읽습니다. ‘황사영 백서’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연구자나 특정 종교에 몸담은 이가 아니면 평생 절대 읽지 않을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런 책을 골랐느냐는 이의제기는 없었습니다. 익숙지 않은 책과의 만남은 우리 자신과 낯설고 깊게 만나는 것이고, 결국 그 만남은 우리의 정신적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소모임으로 모여서 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책 익는 마을’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놓치지 않도록 여러 면에서 배려하고 있다. 수시로 ‘번개’를 쳐서 가족동반 여행을 가는 등 친교를 나눌 뿐만 아니라 분기마다 한 차례씩 같은 책을 읽고 모든 회원이 모이는 저자초청 토론회를 연다. 이권우, 강양구, 이철수, 장정일, 고미숙, 홍세화, 김시천 등 내로라하는 저자들이 이미 보령을 거쳐갔다. 다가오는 시월에는 스물여섯 번째 저자로 ‘풍운아 채현국’(피플파워)의 채현국과 토론을 나눌 예정이다.

대를 이어 책모임 만들기

갑자기 좋아지는 사회는 없다. 한꺼번에 바뀌는 세상도 없다. 작은 기적이 쌓여 언젠가 큰 변화로 이어지는 법이다. 함께 모여서 책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작은 기적이면서, 동시에 작은 기적들을 연이어 쏟아내는 샘물과 같다. 우체국 소장 최미희씨가 이야기한다.

“모임에 나오기 전에는 결론을 미리 내리고 나서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힘은 더 있었을지 몰라도, 왠지 그때는 내 이야기를 남들이 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조리를 잡아 이야기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내 말에 귀 기울이더라고요.”

눈은 깊은 곳에 두고, 귀는 멀리까지 열어둔다. 생각은 다채로움에 걸치고, 입은 배려를 다하며 항상 조심한다. 독서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시민의 삶을 연습하는 것이며, 그와 함께 온갖 색깔로 이루어진 행운의 무지개를 삶에 초대하는 것과 같다. 원 원장이 말한다.

“같이 읽기는 서로 힘을 줍니다. 이 힘은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 미약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고 이를 받아들이다 보면, 나는 항상 옳고 너는 항상 그르다는 식의, 권력의 허위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을 간직하고 나서는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즈음 책 익는 마을에서 유난히 신경 쓰는 일이 청소년 책모임 등을 마련해 아이들한테 그 힘을 물려주는 것이다. 청소년 인문학 강좌도 열고, 백일장도 진행하고 있다. 문 촌장의 목소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중학교 때 책모임을 했던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책모임을 만듭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같을 겁니다. 책을 통해 세상 보는 눈이 넉넉해지면, 아이들은 당장의 입시를 치르면서도 먼 미래를 함께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습니다.”

어느새 서해 바다가 빨갛게 물들었다. 책을 향한 마음이 바다 빛깔처럼 붉디붉다. 그 열정을 보건대, 올 겨울에는 아마도 ‘제1회 보령 청소년 인문학 축제’가 기어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책 익는 마을’ 사람들이 고른 삶의 책들

‘책 익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요즈음 가장 많이 이야기된 책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이다. 이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명숙님을 초청해서 저자초청 토론회도 열었다. 시간이 흐르면 세월호 참사는 현재가 아니라 결국 역사가 될 것이다. 이 역사가 시시한 것이 될지, 의미 있는 것이 될지는 오롯이 기억하는 자의 성찰에 달려 있다. 정말 가슴 아프게 읽었지만, 또 희망을 안겨 주는 책이었다.

장은수·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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