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생활수급권 등 되레 걸림돌
대부분 배우자 외도로 인한 혼외자
"친자식 아니다" 소송 10년새 2배로
유전자 검사 등 절차 까다롭지만 경제적 곤궁 탓에 법적인 결별 감수
# 김모(65)씨는 지난해 35년간 키운 아들을 상대로 친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 소송’을 법원에 냈다. 아들이 태어난 이후 친자식이 아니란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실은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던 탓에 30년 넘게 지금의 아들과 부자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김씨는 최근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아내와 이혼했고 아들과도 부자의 인연을 끊기로 했다. 향후 아들의 존재로 기초생활수급을 못 받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얼마 전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위해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아 든 박모(82ㆍ여)씨는 서류를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생전 처음 들은 곽모(52)씨가 아들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생면부지 ‘법적 자식’의 정체는 바로 50년 전 사망한 남편의 혼외 자식이었다. 남편은 당시 외도로 곽씨를 낳은 뒤 박씨 몰래 출생신고를 했다. 부양 능력이 있는 곽씨의 존재로 수급자 탈락 위기에 놓인 박씨는 결국 소송을 거쳐 올해 6월 곽씨와 남남이 됐다.
경제적 이유로 법적 자식과 관계를 청산하는 ‘황혼’들이 늘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이나 유산상속 같은 현실적 문제 앞에 뒤늦게 존재를 알게 되거나 알면서도 품었던 자녀들과 법적인 결별을 선택하는 것이다. 1일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친자 여부를 가려 달라는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 접수 규모는 2004년 2,316건에서 지난해 4,685건으로 10년 사이 2배 증가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가운데 친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소송 건수가 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법무법인 가족의 엄경천 변호사는 “상담 문의 대부분이 혼외 자식과의 연을 끊으려는 부존재 확인 소송“이라며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혼율이 증가하고 경제사정이 악화하면서 향후 재산분배 등에서 분쟁을 피하기 위한 ‘생계형 파양’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2008년 호주제 폐지 이후 등장한 ‘가족관계증명서’도 친자 확인 소송 증가를 부추긴 요인으로 꼽힌다. 기존 호주제의 호적등본에는 호주인 남성을 기준으로 부모 자녀 배우자 등이 나온다. 때문에 제3의 인물이 고의적으로 미혼 여성의 명의를 도용해 자녀를 등재해도 해당 여성의 호적등본에는 기혼이나 자녀 등재 여부가 표시되지 않았다. 반면 가족관계증명서는 본인을 기준으로 부모 배우자 자녀가 표시돼 이 같은 생면부지 자녀의 존재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2008년 9월 결혼을 앞뒀던 유모(52ㆍ여)씨는 가족관계증명서 ‘자녀’란에 처음 보는 인물이 딸로 등재된 것을 확인했다. 황당한 사연은 사실혼 관계의 한 커플이 아이를 낳았지만 여성이 법적 남편과 이혼을 하기 전이라 호적에 올릴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이 여성은 아무 관련도 없는 유씨 명의를 도용한 뒤 상대 남성을 아버지로, 유씨를 어머니로 둔갑시켰다. 유씨는 소송 끝에 서류 상 딸을 지울 수 있었고 3,000만원을 손해배상액으로 받았다.
법적 자식과의 이별은 절차가 까다롭고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친생자부존재확인 소송에는 유전자 검사 결과 제출이 필수적이어서 알지도 못하는 자식을 직접 찾아가 관련 업체에서 함께 검사를 받아야 한다. 검사 비용도 1인당 15만원이나 된다. 여기에 소송 접수부터 판결 선고까지 통상 4,5개월가량 시간이 걸리고 변호사를 선임할 경우 최소 300만원 이상의 선임료도 부담해야 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소송을 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곤궁해져 울며 겨자 먹기로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한 순간의 외도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가족에게 이중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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