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시내를 떠돌던 개 한 마리가 모스크바 항공의학연구소 직원의 눈에 띄였다. 개치고는 성격이 침착했고 똑똑했다. 유기견은 곧 우주견으로 선발되었고 라이카라고 불렀다. 라이카는 1957년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우주로 간 최초의 생명체가 된 것이다. 라이카는 귀환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지구 생명체가 지구 궤도에 진입하는 과정과 무중력 상태를 견딜 수 있다는 귀중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데이터를 토대로 1961년에는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우리는 라이카와 유리 가가린이라는 이름을 1969년 달에 첫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만큼이나 잘 기억한다.
2007년 나데쥬다(러시아어로 희망이란 뜻)란 이름의 곤충이 우주선을 탔다. 그리고는 33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우주 공간에서 지구 생명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우주라는 비정상적인 공간에서 태어난 33마리의 새끼는 지구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환경에서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인류가 우주에서 번식하고, 우주에서 태어난 인간이 지구에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귀한 실험이다. 하지만 나데쥬다란 이름을 듣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일까? 나데쥬다가 바퀴벌레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나데쥬다가 장수풍뎅이나 귀뚜라미만 되었어도 이런 푸대접을 받지는 않을 거다.
사람들은 바퀴벌레를 극도로 혐오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부당한 대우에 그럭저럭 순응하던 최하층인 꼬리칸 사람들이 자신들이 먹는 양갱 형태의 단백질 블록을 바퀴벌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바퀴벌레는 반란의 이유가 될 만큼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이다.
하지만 난 바퀴벌레를 싫어하지만은 않는다. 그 사연은 길다. 1977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2학기가 시작되고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떻게’란 노래가 대상을 받은 직후였다. 아파트 한 채를 빌려서 운영하는 그룹 과외에서 초록색 비닐 표지의 ‘성문기초영문법’으로 영어를 배우고 있는데, 단수 보통명사 앞에 정관사를 붙이면 추상명사가 된다는 문법을 설명하는 예문으로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란 엉터리(?) 문장이 나왔다. 풉! 어떻게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선생님에게 문장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서울대 공대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내 우상이었던 장발의 선생님은 당황했는지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이야기, 그 이후 기자들이 해직된 이야기, 해직기자 가운데는 얼마 전에 과외를 그만 둔 말썽쟁이의 아버지도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펜이 칼보다 강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체제도 꺾이고 말 것이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난 그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평생 질문 한번 안 하던 놈이 괜한 질문을 해서 내 영웅 박정희 대통령께서 욕을 먹게 하다니! 나만 분노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아이의 부모가 항의를 했는지 선생님은 곧 그만두시게 되었다. 선생님은 마지막 시간에 말씀하셨다. “칼보다는 펜이 세고, 펜보다는 노래가 세다.” 그리고 기타를 치며 당시 TV에 자주 나오던 경쾌한 멕시코 민요를 불렀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 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희한하다 그 모습/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달이 떠올라 오면/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그립다 그 얼굴.”
대학에 들어가고 유신헌법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얼마나 못된 체제였는지를 알게 된 무렵에야 서울대 공대생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불러주었던 노래에 나오는 라쿠카라차가 바퀴벌레라는 뜻이며 경쾌한 멜로디와 달리 슬프고 비장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았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진행된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군은 ‘라쿠카라차’를 혁명가로 불렀다. 아마도 멕시코 전통 의상인 판초우를 입고 모자 솜브레를 쓰고 줄지어 가는 농민군의 모습이 마치 무리지어 가는 바퀴벌레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멕시코 민중들은 보잘 것 없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바퀴벌레와 자신들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이 노래에는 멕시코 민중들이 혁명 과정에 겪은 피맺힌 역사가 담겨 있다.
나는 아예 라쿠카라차를 바퀴벌레로 바꾸어 입에 달고 살았다. “바퀴벌레 바퀴벌레 아름다운 그 얼굴/ 바퀴벌레 바퀴벌레 그립다 그 얼굴”이란 후렴구를 통해 노래가 얼마나 힘이 센지 경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과 여섯 번째 정상회담을 하고 ‘항일전쟁ㆍ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2일 출국한다. 3일 열병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여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동맹국 미국에게 부담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 중인 ‘2015 교육과정’에 따라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영화 ‘암살’의 중심인물인 독립운동가 김원봉과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민족혁명당 활동이 빠질 가능성이 크고, 건국절 운운하면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하려는 세력이 창궐하고 있는 이때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판단은 전적으로 옳으며 큰 의미가 있다. 중국의 전승에는 우리의 항일투쟁의 역사도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번 열병식에 독립군 부대가 함께 행진한다.
나는 중국군의 열병식을 보면서 ‘라쿠카라차’를 부를지도 모른다. 멕시코 농민군과 우리나라 독립군의 심정을 담아서 말이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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