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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軍 선구자에서 여장부로… 장성보다 강한 '우먼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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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軍 선구자에서 여장부로… 장성보다 강한 '우먼파워'

입력
2015.08.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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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반대 무릅쓰고 입대

구타근절 앞장ㆍ병영문화 개선 일조

개별면담·등산으로 병사와 소통

임신과 함께 '강제' 전역 아픔

대구재향군인회 부녀회 창단멤버

지난 해부터 여성회장으로

“야가 지금 뭐라카노? 가시나가 무슨 군대고? 정신이 나갔나!”

1965년 초겨울, 한 여고생이 포항 변두리 작은 단칸방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친은 딸의 군 입대 선언에 화가 나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들을 엄마처럼 돌봐온 큰 딸에게 아버지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는지 몰랐다. 정신을 잃었다 깨 보니 응급실이었다. 병상 옆 아버지는 “가려면 가라. 대신 지금부터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어디 여자가 건방지게 나대냐”는 말을 가장 싫어했던 그녀는 한 달 뒤 세면가방 하나만 들고 육군 여군훈련소로 향했다. 대구재향군인회 김복순(70) 여성회장의 이야기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1960년대에, 그것도 금녀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인 군에 도전했다.

군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여자라고 봐 주는 법은 없었다. 여군 내무반에도 구타가 난무했다. 훈련보다 내무생활이 더 어려웠다. 당시 여군장교는 1년간 사병생활 후 별도의 시험을 쳐서 임관하도록 돼 있었다. 김 회장도 병과 하사관을 거쳐 사관시험과 훈련을 거친 뒤 소위로 임관했다.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어깨에 달았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소위시절 대구 5군수지원사령부(당시 5군수지원단) 공병관 근무를 마치고 중위로 진급, 서울 여군훈련단 소대장을 맡게 됐다. 취사, 운전, 차트, 보일러병 등 60여명의 사병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첫 저녁 점호 시간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팬티만 입고 모포 속에 누워 있었다. 분대장은 씩 웃기만 하고.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 아버지도 이기고 군에 온 사람이다.”김 중위는 그날 밤 군대용어로 한 푸닥거리를 했다. 전 소대원을 연병장으로 집합시켜 2시간 동안 돌렸다. 얼마나 독했던지 중대장이 나서서 “이제 됐으니 그만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기선을 제압했다. 거의 50년 전 얘기다.

업무에선 호랑이지만 누구보다 구타근절에 앞장 선 자상한 여군이기도 했다. 사병생활 경험을 살려 구타가 벌어질만한 곳이면 부지불식간에 등장했다. 구타행위가 크게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구타만큼 비인간적이며, 군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다”며 “아직도 군에 구타가 일부 남아있는 모양인데, 부모들이 안심하고 보낼 수 있도록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악습”이라고 피력했다.

동시에 개별면담을 통해 고민을 함께 나누고, 지휘관의 허락을 받아 매달 2차례 주말 등산을 하며 소통했다. 월 2회, 1회 20명 이내의 병사들이 그와 함께 산에 올랐다. 소대원들의 사기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중위 2차 보직은 여군모병관. 낮은 지원율은 당시 군에서도 큰 두통거리였다. “요즘은 여군 경쟁률이 천정부지이지만 당시만 해도 지원자가 없어 애를 먹었다”며 “무작정 영화관을 찾아가 영화상영 시작 전 10분간 여군에 대해 홍보했고 그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그 해 대구ㆍ경북 지역 여군 지원자는 116명. 한 해 평균 시ㆍ도별로 30명 가량이던 것과 비교하면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도 성차별의 벽 앞에는 무력했다. 소령진급은 당연한 것처럼 여겼지만 결혼 후 1976년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옷을 벗어야 했다.

10여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찾은 직장이 여고 교련교사다. “경상여고(옛 경희여상) 교련교사 면접 때 군인티가 너무 강했던지 퇴짜를 맞았다. 마침 민방위훈련 사이렌이 울렸는데 우왕좌왕하는 교직원과 학생들을 보고 일사불란하게 정리한 덕분으로 합격했다”며 숨겨진 취업 일화를 설명했다. 부임 3년 만에 대구지역 고교 교련교육 시범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후 엔 학생부장을 맡아 고민 많은 사춘기 소녀들의 왕언니, 엄마 노릇을 했다. 제자들 중에는 ‘칼 같은’ 그의 모습에 매료돼 군에 입대, 영관장교로 진급한 케이스도 많다고 했다.

그는 1986년 창설된 대구시 재향군인회 부녀회 창단멤버다. 지난해 4월 대구시재향군인회 6대 여성회장으로 취임,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여군 이등병에서 여군장교, 교련교사, 재향군인회 여성회장 이 모든 것이 ‘도전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김 회장의 소신이 녹아 있다. 별을 단 것보다도 남녀차별 해소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다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여긴다.

“31년간 교직생활에서 얻은 제자들이 가장 큰 보람”이라며 “졸업생들이 찾아와 인사를 할 때 정말 ‘인생 제대로 살았구나’ 하고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남성중심의 직장에서 제 모습을 보고 당당하게 맞선다는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며 “여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차별 받는 일은 크게 준 만큼 위축되지 말고 ‘아름다운 도전’을 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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