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가지 특허로 맥주 용기 개발
맥주회사가 덴마크 산업 이끌어
아트라스콥코, 지속적 R&D로
기름 필요 없는 압축기 개발
제약사 로슈, 과학자 독립 부서로
실패 거듭해도 R&D 매달려 성공
경제협력개발기구(OCEC)의 과학기술 혁신역량 지수는 연구개발(R&D)이 산업 혁신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지난해 이 지수의 상위 10개국 중 미국과 일본,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나머지 7개국이 모두 유럽이다. 스위스와 스웨덴은 수년째 5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 혁신 강국이고, 덴마크는 최근 과학계에서 신흥 혁신국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3개국의 공통점은 오랫동안 산업 혁신의 모범이 된 기업들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업들이 산업 혁신의 모범이 된 비결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꾸준히 추진한 R&D다.

늘 한결 같은 맛을 지닌 칼스버그 맥주의 비결
168년 역사의 덴마크 맥주회사 칼스버그는 최근 세계 맥주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매장에서 생맥주를 주문하면 직원이 커다란 철제 용기(케그)에서 술을 따라 내온다. 맥주업체 대부분이 신선도 때문에 철제 케그에 담아 맥주를 공급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산화탄소로 맥주를 밀어내야 나오기 때문에 늘 이산화탄소 공급용기를 매장에 구비해야 하고 빈 케그는 세척해 다시 쓰기 때문에 맥주 회사로 보내야 한다. 그만큼 매장들은 이산화탄소 구매와 케그 배송 비용이 부담이고 소비자들도 이산화탄소 양에 따라 맥주 맛이 달라지니 좋을 리 없다.
칼스버그는 독창적인 생맥주 기기 ‘드래프트 마스터 플렉스 20’을 개발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기기는 케그 재질이 플라스틱이고 이산화탄소 대신 밀폐 실린더가 일정 압력을 가해 맥주를 나오게 한다. 따라서 별도 이산화탄소가 필요없고 케그 역시 사용 후 폐기하면 된다. 당연히 매장들은 관리가 편하고 비용도 절감돼 대환영이다. 맥주 맛도 늘 일정하게 유지된다.
더불어 유통기한도 늘었다. 맥주를 담은 뒤 철제 케그는 5~7일 보관 할 수 있지만 플라스틱 케그는 30일까지 가능하다. 덕분에 소규모 매장에서도 오랫동안 맥주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다.
18개국에 도입된 플렉스 20은 이달 초 국내에도 30여개 매장에 설치돼 맥주 애호가들을 사로잡고 있다. 칼스버그 관계자는 “포화상태여서 경쟁이 치열한 유럽 맥주시장에서 혁신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며 “10년 전 시제품을 내놓은 뒤 협력사들과 R&D를 지속해 우리만의 특허기술 7가지가 결합된 이 기기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아트라스콥코의 기름이 필요 없는 압축기
142년 된 스웨덴 산업장비 제조사 아트라스콥코는 우리나라 포함 약 180개국에 진출해 있다. 국내 산업용 중장비, 공장 설비, 각종 공구상당수가 이 회사 제품을 사용한다.
대표 제품은 공기를 빨아들여서 빠른 속도로 세게 내뿜는 압축기다. 건설 현장에서 바닥을 뚫거나 공장에서 제품을 조립하고, 양식장에 다량의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등 산업 각 분야에서 압축기를 사용한다.
압축기는 대개 기름을 넣어 작동시킨다. 다른 제조사들이 급유식 압축기에 필터를 달아 내놓았지만, 아무리 정교한 필터라도 기름을 사용하는 한 오염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순 없다.
이에 아트라스콥코는 60년 전부터 ‘오일 프리’를 지향해왔다. 신생아 인큐베이터나 의약품, 식품 포장 공정 등엔 최고 순도의 공기가 공급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업체는 지속적인 R&D 결과 스크루(금속 날개) 등 기계장치의 물리적 원리를 적용해 기름 없이 공기를 빨아들이고 내보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9년 전 업계 최초로 국제인증을 따낸 뒤 제품화에 성공해 병원이나 제약ㆍ식품 공장 등에 기름없는 압축기를 납품하고 있다. 아트라스콥코 관계자는 “엔지니어들이 정기적으로 사용 기업을 찾아가 서비스하기 때문에 안전과 편의성 중심의 기술개발을 지속하게 된다”며 “작은 공구 하나도 손이 덜 아프도록 고치고 기계 사용 내역이 자동 기록되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는 등 끊임 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온 것도 R&D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실패를 두려워 않는 로슈의 R&D 문화가 낳은 유방암 치료제
현재 완치가 가능한 유방암은 15년 전만 해도 난치병이었다. 특히 특정 유전자(HER2)가 지나치게 발현된 유방암은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유방암 환자 5명 중 1명이 이런 경우다.
그런데 1998년 미국 생명공학기업 제넨텍이 HER2를 억제하는 치료제 허셉틴을 출시해 유방암 치료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스위스 제약사 로슈는 2009년 제넨텍을 전격 인수했다.
인수 후 로슈는 제넨텍의 과학자들을 독립 부서로 배치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로슈 관계자는 “임상연구 실패 후 이를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실패를 R&D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는 문화가 녹아들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개발을 통해 허셉틴을 기반으로 퍼제타, 캐싸일라 등을 추가 개발해 유방암 치료의 혁신을 이뤄냈다. 주사 방식도 바꿨다. 30~90분 동안 맞아야 했던 정맥주사 형태의 허셉틴을 2~5분만에 맞을 수 있는 피하주사로 변형했다.
이들 기업의 성공 사례는 기술 혁신이 곧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함께 높이는 방법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내 기업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본보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함께 631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설문조사에서 51.7%인 326개 기업이 경쟁사와 차별화한 기술혁신을 위해 ‘자체 R&D 강화’를 가장 효과적 수단으로 꼽았다.
임소형기자 precar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